욕하며 배운다는 말이 있다. 우리 정치가 그렇다.1996년 4월 15대 총선이 끝나자마자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은 국회 의석 과반수 돌파를 위해 야당과 무소속에서 당선자를 빼내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열린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야당 총재인 DJ가 당시 대통령 YS에게 이렇게 따졌다. "여소야대는 13대부터 연3회에 걸친 현상이다. 이를 인위적으로 변경하려다 국정의 혼란을 가져 왔다. 이런 잘못을 되풀이해선 안된다.
" 이에 대한 YS의 대답이 이랬다. " 무소속 당선자 대부분이 우리당에 공천을 신청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중 상당수가 이미 입당의사를 밝혔다. 정치인이 자기 소신껏 행동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때 DJ의 심정이 어땠을까.
연초에 열린 영수회담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민주당 의원들의 자민련 이적은 총선 민의와 맞지 않는다"면서 대통령의 사과와 원상회복을 요구하자 나온 DJ의 대답. " 자민련이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도록 한 것이 민의다.
한나당이 국회법 처리를 물리력으로 막아 이런 일이 생겼다. 내일이라도 국회에서 국회법을 표결로 처리하면 (빌려 준 의원들을) 돌려 올 수 있다."
임기 후반기의 YS 정치는 원내 과반수의 오만과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오기가 고비마다 번득였고, DJ는 이를 비난하며 야당과의 협력과 공존을 촉구했다.
그러나 YS는 대선을 1년 앞둔 96년 말에도 자민련에서 또 의원과 도지사를 빼가고, 노동법을 날치기 처리했다. 지금 그때를 떠올리는 것은 왜인가.
'의원 3명 꿔주기'로 안되니까 '1명 더 보내주기'를 감행하고는 "국민 비판은 받겠지만 야당의 비판은 온당치 않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해주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이른바 " 국민을 상대로 정치하겠다"는 말은 지난 날 군사정권이 장내투쟁의 원천적 한계를 느끼고 장외로 나간 야당을 향해 써먹던 구호이다.
정작 국민을 상대로 하는 말이 아니기 쉽다. 실제로 DJ는 지난해 말 국민을 향해 몇 차례씩 국정위기에 대한 반성의 말을 했지만, 새해들어 나온 국정쇄신책이란 DJP 공조복원과 '강한 정부' 일 뿐이다.
한나라당 이 총재가 DJ를 비난할 때 즐겨 사용하는 말이 '정도(正道)'와 '법치'이다. 그런 이 총재가 지금 '안기부 자금' 사건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는 그것과 거리가 멀다.
여권이 빌미를 주기는 했다. 수사에 대해 검찰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듯이 나서몰아 세우고, 리스트가 유출되고 하니 야당이 반발할 만하다.
그렇다고 안기부 돈 1,000억원 이상이 구여권에 전달됐다는 사건의 실체가 달라질 리 만무하다. 국가 예산이 아니라는 주장이라면, 그 부분도 진상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강삼재 의원을 출두시켜 진술토록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설마 예산이 아니라면 무슨 돈을 어떤 식으로 모아 어떻게 멋대로 나눠 썼는지 국민들은 몰라도 된다는 얘기인가. 또 정치자금이라고 해도 나라 예산(국고수표)을 이용해 '돈 세탁' 한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란 말인가.
검찰도 돈 받은 정치인은 조사하지 않기로 했다니 법원이 체포영장을 발부한 강의원만은 반드시 검찰에 나가도록 해야 한다.
특검제로 모든 정치자금에 대해 조사하자는 주장은 그 다음이다. 이 총재가 사과 한마디 없이 "총풍도, 세풍도 다 이겨냈는데." 라며 방탄국회를 열고, 원외 투쟁을 독려하고, 한나라당이 "정권 퇴진운동도 불사하겠다"며 농성을 벌이는 것은 결코 정도와 법치가 아니다.
21세기 첫 새해 벽두부터 사생결단식 대결을 벌이는 여야의 눈에 진정으로 민생이 보일 리 없다.
그렇기는 해도, 조금이라도 국민을 의식한다면 욕하는 상대를 따라하고 있지는 않은 지 생각해 보라. 빨리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국민을 위하는 길이다.
최규식 편집부국장
kscho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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