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문학기행] (53) 박라연의 시집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문학기행] (53) 박라연의 시집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입력
2001.01.17 00:00
0 0

*없는게 많아 더 따뜻한 평강공주의 집1989년 9월 어느날. 친구가 "이 근처에 시인의 집이 있다고 하니 한번 가보자" 고 했다. 혼자 오랜 습작을 하며 시인을 꿈 꾸던 박라연(50)씨는 '시인의 집' 이라는 말만으로 가슴이 설?다. 그 시인이 누구인지 몰랐다.

평강공주의 집>

서울 성북구 정릉1동 227의 29 빨간 단층 벽돌집. 낮은 담장에는 넝쿨장미가 활짝 피었고, 담장 너머 보이는 마당의 큰 화분에는 대추나무가 있었다.

가난한 동네를 환하게 해주는 그 꽃과 나무들. 마치 행복한 기운이 그 집을 감싼 듯했다.

"산동네지만 저렇게 행복을 가꾸는구나."

그 해 12월. 2년 동안 품어 와 금방이라도 만삭의 여인이 출산을 하려는 듯, 나올 듯 하면서도 좀처럼 구체적 이미지로 만들어지지 않던 온달 설화를 소재로 한 시 한 편이 있었다.

박라연씨는 그때 그 산동네 시인의 집이 생각났다. 가끔은 전기가 나가도 좋은 낮은 창문가에 달빛이 언 채로 걸려있어 불빛이 돼주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흰 봉투 한 무더기에 이제는 설화로만 존재하는 온달공주의 애틋한 사랑의 꽃씨와 향기를 형형색색 담고 싶었다.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는 이렇게 태어났고, 공주는 그때부터 순수한 영혼의 소리로 세상의 아픔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는 그곳이 시인 신경림씨의 집인 줄도 몰랐다. 시를 쓰고 나서는 처음이자 11년 만에 다시 찾은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의 집에는 그 시인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그날도 그랬던 것처럼 평강공주는 집 밖을 서성거릴 뿐이었다. 높아진 담장에는 넝쿨장미 대신 다른 꽃나무가지가 드리워져 있고, 마당으로 옮겨진 대추나무는 지붕보다 높이 자랐다.

옆집의 깔끔한 정원수에 비해 너무나 소박한 나무들. 이제는 산동네도 아니다.

건너편 고층아파트가 이곳을 내려다 볼만큼 낮아진 동네. 박라연씨는 "고향은 갈수록 작아 보이고, 산동네는 세월이 갈수록 높아진다"고 말한다.

평강공주는 작은 물방울>

평강공주는 그 낮은 곳의 '작은 물방물' 이었다. 작은 물방울은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그루 대추나무' 가 돼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으로 꿰매려' 하고, 달궁마을 산안개가 돼 발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 지리산 고로쇠나무의 투박한 어깨를 주무른다.

'닫혀진 문틈 사이라도 가만히 그대와 닮은 슬픔으로 흐르고 싶어한다'('작은 물방울의 노래2' 에서). 아니면 '흘러 흘러 가장 낮은 땅에 숨어사는 예수님을 만난다'('작은 물방울의 노래3'에서).

이렇게 스스로를 낮춘 평강공주는 '열매 떨어진 꽃대궁에 고인 눈물이' ( '무화과나무의 꽃' 에서)되어 민들레 뿌리까지 뜨겁게 적시고, '시든 잎새들을 반짝이게 한다' ( '난쟁이'에서).

그것은 작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하고 사랑으로 빛나게 하는 힘이 된다. '숨진 네 그리움의 뿌리를/ 풀이끼로 포근히 감싸준 그날/ 삐죽이 고개 내민 새끼 촉 하나/ 아하, 서로의 눈빛만으로/ 새끼를 치는구나' ('풍란'에서)

외가에 맡겨진 소녀는 양조장에서 함께 놀던 아이들이 "학교 간다" 며 헤어질 때 "그래, 갔다 와" 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왜 학교에 못가지?" 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열 한 살에야 비로소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소녀는 아무리 힘들어도 저항할 줄 몰랐다. "아주 낮췄을 때 세상이 나에게 주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40년의 그런 시간이 그에게 준 것은 순결한 영혼의 회로 였다. 그 회로에 들어가면 어떤 자연도, 죽음도, 상처도 정화돼 골목길 잡상인의 '리어카에 오글오글 모여있는 한 많은 번데기도 수만 갈래의 비단실을 뽑아내는' 누에가 된다.

그 비단실이 이웃들의 추운 살갗을 위하는 것이라면 즐겁게 쓰러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위해 그는 기꺼이 악과 어둠으로 들어가 자신의 영혼을 조금씩 떼어냈다. 그것이 시인의 길이라고, 모든 시인은 그러하리라고 믿었다.

공중 속의 내 정원>

1993년 어느날. 그는 어둠의 악마성에서 끝없이 살아나와야 하는 시인으로서 자신이 싫었다. 쓸쓸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분개하지 않고 감사하던 자신이 아니었다.

탐욕인가, 자부심인가. 남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아무것도 모르고 시를 사랑했던 그는 자신과 시인에 대한 실망에 시를 버리고 싶었다. "세균이 너무 많았다" 고 했다.

그 때문인지 몸까지 심하게 아팠다. 죽음이 그에게 가까이 오는 듯했다. 아니 그가 죽음을 부르고 있었다.

죽음으로 가려는 마음을 붙잡아 두기 위해 그는 죽을 것 같은 마음을 추스려 '공중속의 내 정원' 을 만들었다.

'공중의 허리에 걸린 석양/ 사각사각/ 알을 낳는다' (시 '공중속의 내 정원1' 에서). 그 정원에서 그는 다시 한방울의 이슬이 되고, 수액이 되고 혈액이 돼 죽음을 생명으로 부활시키려 틈새로 스며든다. 그가 사는 서울 방배동의 한 아파트 사각 거실 창문으로 아파트 건물이 둘러싼 큰 사각 정원이 보인다.

창문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정원은 하늘 속으로 떠오른다. 까치가 메타세쿼이아 나무에 집을 짓다가 나무가 자라자 공중으로 사라져버리려는 듯 꼭대기에 새 집을 지었다.

그는 공중정원을 거닐면서 깨달았다. '산의 무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인데 '사람(시인)의 무게만 희고 파래져 돌아갈 뿐'('질량보존의 법칙1'에서)이며 '가장 성스럽게 숨쉬는 항아리/ 너의 뚜껑은 오직/ 산 자의/ 첫 울음소리만 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기도한다. '한 방울의 이슬만으로도/ 저승을 밀어낼 수 있다고 말해주세요/ 부디,'('생' 전문)

그의 공중정원은 이미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처음 평강공주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박라연·백의선씨 부부

아직도 그들은 '춤 추는 남자, 시 쓰는 여자' 이다.

시를 쓰기 전 여자는 죽도록 춤을 추다 늦은 저녁 아파트 계단조차 오르지 못해 주저앉은 남자의 '따뜻한 식탁을 위해 공중의 무대를 위해 오랫동안 물방울 소리와 친했다.'(시 '레 실필드' 에서)

평강공주는 춤추는 '온달' 을 위해 살았다. '그녀에게 그는 나진스키나 바리시니코프'였다. 남자가 몸의 언어로 시를 쓸 때, 여자는 그 아래서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었다.

이 백의선(원광대 무용과 교수) 박라연 부부는 세 가지가 같다. 나이, 고향 그리고 맑은 마음. 춤추는 남자는 그 평강공주가 시를 쓸 때 가장 "보기 좋다" 고 했다.

시 때문에 열이 펄펄 오르고 심장이 졸아들 때 그는 매주 서울과 익산을 수없이 왕복하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아내의 가슴에 초록 잔디를 하나하나 심어주었다.

'속살을 한번 더 벗겨내고 새하얀 알몸으로' 다가가는 '생밤 까주는 사람' 이 됐다.

시 쓰는 여자는 가난한 온달에게 정성을 쏟는 행주치마 두른 평강공주로 돌아가고 싶었다.

'시'가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했다. 시가 뭔데. 이렇게 자나깨나 시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시는 늘 마음에 차지 않았고, 고정관념의 벽이 높은 시인의 마을은 그녀에게 상처만 주었다.

그런 공주를 그 옛날 공주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한없이 기다리고 지켜보는 주는 온달. "나는 당신 시가 좋기만 한데."

춤추는 남자는 한국일보에서 문학기행을 떠나자는 연락을 받고 너무 좋아 뛸 듯이 이방 저 방을 돌아다니는 아내를 보고 마음속으로 춤을 추었다.

아내가 이렇게 설레고 기뻐하는 모습을 본 것이 몇 년 만인가. 춤추는 남자는 알았다. 시 쓰는 여자는 결코 시를 버리지 않았음을.

그것이 기뻐 춤추는 남자는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의 집으로 가는 날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아내를 위해 앞장을 섰다.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 .전기가 .나가도 .좋았다 .우리는 .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땀 한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신태인 일몰

누구였을까

저처럼 아름다운 공중을 수태시킨 자,

무엇을 잃으면

저처럼 아름다운 죽음을 출산한

태양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을까

작가연보>

▦1951년 전남 보성 출생 ▦ 방송통신대 국어과, 원광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박사)

▦광주대 강사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가 당선돼 등단

▦ 시집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1990년), '생밤 까주는 사람'(1993년),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1996년), '공중 속의 내 정원'(2000년)과 산문집 '춤추는 남자, 시쓰는 여자'(1994년)

이대현기자

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