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관 예산의 세부항목이 공개되면 정보기관이 실행한 사업이나 공작의 규모가 드러나 버린다. 전문가들은 항목별 예산규모만 알아도 그 정보기관의 활동 수준과 내용을 대강 추출해 낼 수 있다고 한다.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정보기관의 예산을 비밀에 부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부 국가에서는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정보기관의 예산을 비공개로 심의하기는 하지만 그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다.
우리나라도 국회 정보위원회가 국정원의 예산을 심의하나 경상비 중심의 국정원 본예산만 대강 훑어 볼 뿐 재경부 예비비 등에 포함돼 있는 공작활동이나 사업비는 접근이 힘들다.
연초부터 정국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안기부 선거자금 사건은 신한국당 선거자금으로 지원됐다는 1,192억원의 출처 공방으로 한 고비를 맞고 있지만 사건의 실체는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검찰 주장대로 문제자금 모두가 1995년도 안기부 예산에서 나왔다면 당시 안기부의 정치활동 또는 정치공작비의 규모는 매년 1,000억원이 넘었다는 얘기가 된다.
안기부의 대북 또는 해외 활동비가 고무줄처럼 변동이 심하지 않다면 매년 그 정도의 돈이 국내정치에 투입됐을 터인데 그 많은 돈이 다 어디에 사용됐을까.
검찰은 그 자금이 전액 국고수표로 지출됐고 1,192억원에 대한 허위지출결의서까지 확보했다니 두고 볼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의 반박에도 일리가 있다. 95년도 안기부 예산은 4,920억원으로 경직성 경상비 3,000억원을 포함해 거의 대부분의 사용처가 드러나 있으며 전체 예산에서 1,000억원이나 빼돌려졌다면 안기부 조직이 굴러갔겠느냐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95년도 안기부 예산집행 내역을 일일이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검찰이 확보한 지출결의서가 허위라면 한나라당이 확인했다는 95년 안기부 예산지출 내역은 무의미하다.
한나라당 주장대로 문제자금이 안기부 예산이 아니라 별도로 조성된 자금이라면 무엇 때문에 국고수표로 '역(逆)세탁'을 했는지가 의문으로 떠오른다.
정권을 담당해 본 경험이 있는 한나라당이 지난 연말 새해예산 심의과정에서 국정원 예산삭감을 끈질기게 주장했던 것도 국정원 예산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은 아닐까.
안기부 예산에 정권이 정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유돈이 포함돼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는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첫해 국고 반납된 안기부 불용예산이 300억원 가까이 됐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속칭 통치자금 명목으로 대통령이 갖다 쓸 수 있는 예산을 줄였더니 그 정도가 남았다는 얘기다.
4ㆍ13총선 때 안기부는 다른 방법으로도 신한국당을 지원했다. 일부 공기업으로 하여금 신한국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토록 한 사례도 있었고 여론조사와 경합 지역의 현황을 파악해 여당후보를 지원하기도 했다.
현실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던 정보기관의 관행은 근절되어야 한다. 정치혼란 등 많은 사회적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안기부 선거자금사건 수사의 의미는 이것이다.
정보기관의 고유업무를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보기관 예산의 통제와 투명성 보장도 강구돼야 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보기관이 정치와 선거에 개입할 수 없게 된다면 그 첫번째 수혜자는 야당의 차기 대선후보일 것이다.
이계성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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