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월13일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가 간염으로 타계했다. 향년 78세.호는 가인(街人)이고, 출생지는 전북 순창이다. 메이지(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경성 법학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에서 가르쳤다.
을사보호조약 직후 10대의 열혈청년으로 순창읍의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한 일도 있지만, 그의 항일운동은 서른세살에 변호사로 개업한 뒤에 주로 민족해방 운동가들의 변론을 통해 이뤄졌다.
그는 6ㆍ10 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원산 파업사건, 단천 노조사건 등의 관련자들을 무료로 변론했고, 1927년에는 좌우합작단체인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한번도 사회주의자였던 적이 없었던 가인은 늘 사회주의자들 곁에 벗으로 있었다.
광복 뒤에는 한민당의 창당에 참여해서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고,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해 1957년 정년 퇴임했다.
대법원장 시절 그가 보여준 사법적 엄정함과 근검은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대법원장 퇴임식에서 남긴 이임사는 그의 사람됨을 압축한다.
"대법원장으로 일하는 동안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전국의 법원 직원들에게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한 일이다.
인권옹호를 위해서 사건을 신속히 처리하도록 다그쳤던 것과 또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의 보수를 가지고 오로지 법만을 위해서 살라고 했던 것이 그것이다.
나는 모든 사법 종사자들에게 정의를 위하다가 굶어 죽으면 그것을 곧 영광으로 알라고 말하곤 했다. 그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는 수만 배 명예롭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제 시기와 해방기에 좌익이 존경하던 거의 유일한 우익인사였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초대 수장(首長)이 가인이었다는 것은 사법부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에 축복이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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