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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노근리 아픔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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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노근리 아픔은 끝나지 않았다

입력
2001.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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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29일 AP통신의 폭로로 전 세계에 알려져 미국의 조야는 물론 한국 국민들에게도 큰 충격을 준 '노근리사건'은 오늘로써 공식적인 사건 종결에 이르게 됐다.AP에 의해 사건이 폭로되자 클린턴 대통령은 코언 국방장관에게 신속한 조사를 명령, 정부 대책단과 그 예하의 조사반 및 민간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에 착수하게 하였다. 한편 우리 정부도 지난해 10월 미국 정부의 조치에 상응하는 기구를 설치하고 조사작업에 임했다.

'노근리사건'은 6ㆍ25전쟁 당시인 1950년 7월26일부터 29일 사이에,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한 공중폭격과 지상군 사격으로 '300명 내외'의 민간피난민이 '대량학살'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노근리양민학살피해대책위원회'가 1960년부터 13차례나 한미 양국정부에 소청했지만 표면화하지 않다가 한미 양국의 기독교교회협의회(NCC)의 노력과 거기에 협조한 AP 등 통신사의 끈질긴 추적끝에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게 됐다.

사건의 전모를 밝혀야 할 책임을 지게 된 양국 정부는 원래 지난해 '6ㆍ25 50주년'을 기하여 사건 조사를 종결하고 이 문제의 해결방안을 강구하려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100만건'의 문서를 뒤적여야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미측의 주장에 따라 당초 예상보다 늦게 공동발표문과 사후 대책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동안 한미 양측이 몇차례에 걸쳐 협의한 것을 비롯하여 우리 대책단과 조사반, 그리고 자문위원회가 활동한 것은 여기서 일일이 소개할 수 없다.

다만 이 사건의 조사를 계기로 한국군의 전사 연구가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조사착수 초기부터 한국측은 피해자들의 증언 외에는 문서화한 자료를 거의 보유하지 못했다. 따라서 거의 전적으로 미측이 발굴한 문서에 의존하여 조사에 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고의 노력과 집합적인 연구토론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고 역사적인 진실을 찾는데 큰 결실을 거두었다. 또 한국측의 이러한 노력을 '조사주권'의 영역을 넓히는 데도 적잖은 성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겠다.

'노근리사건 '의 진실규명과 관련, 처음에 이 사건의 존재자체를 부인하던 미측이 사실의 존재는 물론 이 사건이 미군의 살상에 의해 일어났다고 인정하게 된 것은 하나의 성과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7월26일의 공중폭격 문제와 지상군의 사격명령 존재여부, 사상자 숫자 및 이 사건의 성격규명 문제 등을 양측간의 입장차이로 그 간격을 더 좁히지 못하고, 공동합의문의 애매함의 수준으로 밖에는 처리하지 못한 것은 공동조사가 갖는 한계로 미뤄 버리기에는 아쉽다.

따라서 40여년간 일관되게 투쟁해 온 '피해대책위원회'의 주장이 전적으로 수용되지 못한 것은 안타깝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후 처리 방안과 관련, 미국 정부는 클린턴 대통령의 서면 성명과 공동합의문 발표, 이어서 추모비 건립과 장학사업 등을 제시하면서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은 거부했다.

따라서 배상문제는 민간법정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이로써 그동안 노력한 양국 정부는 한계와 부담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몇가지 느낀 점이 있다. 첫째는 한미 양측의 합동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데다 우리측 조사반이 미측 자료에 독자적으로 접근하지 않아 진상파악에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둘째, 조사가 시작되면서 미 육군장관 칼데라가 "전쟁 범죄자는 시한에 관계없이 면책될 수 없다"고 공언, 이후 미측 참전자들의 증언 회피ㆍ번복현상이 나타나 진실파악에 애로가 있었다.

셋째 사격명령과 관련, 미측이 국가책임을 의식한 나머지 문서화한 '명백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사격명령 자체가 없었다는 식으로 몰고 가려고 한 점이다. 사격명령에 관련해서는 미측 자문위원 중에서도 미 정부측의 이러한 입장에 비판적인 인사가 있었다.

40여년간 끌어오던 이 사건의 해결에는 한미 양국간의 우호동맹관계와 미 참전군인들의 명예존중이라는 점이 특별히 고려되었다.

노근리 사건의 아픔은 정부간의 일단계 매듭으로 치유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건이 민족적 차원의 공동체 아픔으로 승화되어 치유해야 할 과제로 떠오른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만열(숙명여대교수ㆍ 노근리사건대책단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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