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tolerance) 정신이 이제 우리 문화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프랑스에서 20여 년의 정치적 망명생활을 접고 이제는 한국에 돌아온 홍세화씨가 1995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통해 똘레랑스라는 화두를 처음 던졌을 때, '역지사지(易之思之)'나 '관용'이라는 삶의 태도 정도로 이해됐을지 모른다.똘레랑스는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용인한다'는 그 정신은 정치적으로 경직된 한국 사회에선 이념적 근본을 건드리는 사상적 의제라는 것이다.
분단이나 국가보안법, 동성애 문제, 지역감정의 골이 뿌리깊은 한국적 맥락에서 보면 진보적 개입인 셈이다. 정치적 이방인이었던 홍씨의 진심은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홍세화씨가 번역한 '왜 똘레랑스인가'는 그 진심에서 좀 더 차분히, 그리고 근원적으로 똘레랑스에 대해 귀기울여보기를 권하는 책이다.
6년전 프랑스 체류기간에 직관적으로 느껴 소개했던 똘레랑스에 대한 이론적 해설서 격이다. 저자는 프랑스 정치학자 필리프 사시에. 로크, 루소, 몽테스키외 등 계몽사상가 뿐 아니라 칼 포퍼, 마르쿠제 등 현대 사상가에 이르기까지 똘레랑스는 지난 4~5세기동안 서양 지성사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사회적인 의제라고 밝힌다.
저자가 개관한 똘레랑스의 역사는 결국 '자유'의 확대와 궤를 같이 한다. 똘레랑스는 애초 16세기 기독교적 진리의 단일성이 조각난 후 신앙의 다양성에 직면한 국가권력이 여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로 제기됐다.
신ㆍ구교도의 대립으로 저질러진 화형 등 온갖 학살과 추방 등의 앵똘레랑스(intolerance) 행위에 대한 반성을 통해 그 내용은 더욱 풍부해지면서, '생각하는 자유가 인간의 본질'이라는 스피노자에 의해 기초가 다듬어졌다. 자유의 절대적 필요성으로 똘레랑스가 정당화된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자유의 문제와 긴밀히 결합하면서 인류애, 그리고 영원불멸한 권리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나아갔다고 밝힌다. 똘레랑스는 16세기 이래 발전한 개인주의적 사회 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테마인 셈이다.
개인주의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고, 다양성의 포용에 아직도 주춤하는 한국사회에 던지는 함의가 큰 책이다.
송용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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