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도 한국인들은 20세기형 가족 형태를 이루며 살아갈 것인가?이혼율의 급증, 재혼율 증가, 출산율 감소, 독신 가구의 증가, 결혼연령의 증가 등 최근 인구 관련 통계를 보면 대답은 분명해진다. 한국의 고전적 가족 형태는 해체의 길을 걷고 있다. 대신 편부모 가족이나 무자녀 가족, 재혼 가정, 동거ㆍ동성애ㆍ공동체 가족 등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말 일부가 발표된 '2000년 인구센서스' 결과에 따르면 가구당 가족수는 3.1명이다. 더이상 부모와 두 자녀 가족이 표준 모델이 아닌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1995년 센서스 결과만 보더라도 실제 부모와 자녀만으로 이루어진 가구 수는 전체 가구 가운데 50.4%에 지나지 않는다(2세대 가구는 63.3%). 같은 때 자녀가 없는 가족은 12.7%, 단독가구는 12.7%, 편부모 가족은 7.4%에 이르는 등 가족형태는 갈수록 분화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통칭 '신가족'이라 부를 때 이는 성평등적 구조라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편부나 편모 가족, 동거ㆍ동성애 가족 등에 대해서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
특히 호주제는 전통가족을 떠받치는 이념적 중심이 돼 왔다. 호주제 철폐를 위한 시민연대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 소장은 "21세기 가족의 방향은 양성 평등과 개인의 행복추구, 다양성 인정에 있다"고 말했다.
예술과
관련한 개인 사업을 하는 최모(40)씨. 독신을 고집했던 그는 같은 철학을 가진 정모(35ㆍ여ㆍ디자이너)씨를 만나 사귀다 5년 전에 결혼했다.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게 이들의 결혼조건이었다. 최씨 부부의 생활은 완벽한 부부 중심이다. 아이가 없다 보니 동호회 등 취미활동이 많은 편인데 서로의 여가나 사생활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는다.
"아내라기보다는 여자친구, 배우자라기보다는 인생의 동반자이죠. 후회는 없어요. 입양도 생각하지 않아요."최씨는 인생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이 보통 사람들과 다를 뿐 '신가족'이라고까지 불리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사법고시 준비생 김모(28)씨. 그는 최근 동갑의 여자친구 박모씨와 동거에 들어갔다. 결혼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찾고 싶지만 경제적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망설이는 김씨에게 먼저 직장을 구한 박씨가 동거를 제안했다.
두 사람은 가사분담이나 부부생활에서의 남녀 차이가 없다. 김씨가 청소와 설거지를 맡고 박씨가 요리, 빨래, 세금납부 등을 맡고 있다. 이들의 지출 내역 중 비교적 아낌없이 쓰는 항목은 문화비와 외식비. 동거부부의 생활이 미래를 위한 저축보다 현재의 행복에 가치를 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함께 생활해 보고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한 상태에서 결혼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박씨는 "헤어지면 남남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 상대방을 존중하고 관계를 깨뜨리지 않도록 노력한다"고 말했다.
레즈비언
영화제에서 만나 서로 호감을 갖게 된 이모(35)씨와 장모(27)씨 두 여자는 이씨의 제의로 함께 살기로 했다. 나이가 많고 생활비를 벌어오는 이씨가 가장 역할을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일반 부부와 같은 수직적 관계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장씨는 "언니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막거나 권위를 내세우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주위의 시선과 제도이다. 이들은 자녀입양, 유산상속, 의료ㆍ연금 혜택 등에서 동성애 부부에게도 양성 부부와 같은 법적 지위를 부여한 프랑스의 경우를 잘 알고 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어린이들이 소규모 그룹으로 나뉘어 생활하는 '들꽃피는 마을'은 일종의 공동체 가족 형태이다.
45명의 어린이ㆍ청소년들이 경기 안산시, 충북 진천군, 전북 장수군 등의 열 가구에 나뉘어 생활교사와 함께 살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데 가장 좋은 환경은 가정'이라는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6년 전 시작됐다.
아이들은 부모 역할을 하는 생활교사로부터 충분한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있다. 물론 생활교사들은 아이가 없는 가정이 대부분이다.
'들꽃피는 마을'을 운영하는 김현수 목사는 "문제아로 몰렸던 아이들도 따뜻한 가정을 맛보게 되면 금방 어린이의 천진함으로 돌아간다. 어떤 이유에서든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가족의 형태는 앞으로 늘어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김동선기자
weeny@hk.co.kr
■신가족 점차 일상화
뉴욕대 종교학 교수 제임스 카스는 가족을 '무한 게임'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선거나 스포츠처럼 한 쪽이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유한 게임과 달리 무한 게임은 게임을 지속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무한 게임에서는 참가자 모두가 승리를 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서 현대 가족의 새로운 정의를 엿볼 수 있다.
한국여성개발원 변화순 연구원은 다양한 가족 형태가 출현하는 배경에 대해 "근대 가족이 더 이상 자유와 개성을 추구하는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족 구성원 간의 역할분담이 분명하고 수직적 구조인 근대 가족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역할을 여성에게 떠넘겨 형평성이 떨어진 형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여성의 급격한 사회진출과 의식변화는 이 같은 가족 형태를 크게 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혼을 용이하게 해 주는 방향으로의 가족법 개정(1990년 시행)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또 남녀고용평등법(1987년)이나 가정폭력방지법(1997년)의 시행, 종합적인 여성정책 등 법과 제도의 변화는 여성에게 자립의 근거를 주었다.
변 연구원은 "과거와 달리 여성들은 더 이상 시댁과의 갈등, 배려 없는 부부관계를 참지 않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제 가족이 결속을 유지하는 데 부양이나 희생보다는 친밀성, 형평성이란 가치가 더 주요한 작용을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한편 가족 형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일반적인 인식이나 국가 정책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편이다. 편부모 가족은 '결손 가정' 취급을 받고, 결혼 적령기를 넘긴 독신들은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저소득 편부모 가족에 대한 사회적 지원도 궁색하다.
그나마 모자보호 시설이 전국에 9군데 설치돼 있는 것과 달리 편부 가족 지원은 전무하다. 최근 편부모 가족 실태를 조사한 김경애 여성특별위원회 사무처장은 "몇 년 전만 해도 남자들은 쉽게 재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지원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편부 가정은 실업, 알코올중독 등의 문제까지 더해 더 비참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편부모 가족을 지원하는 것이 오히려 이혼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이에 대해 김 처장은 "그러나 가족 해체가 돌이킬 수 없는 추세라면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방안이 모색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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