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국민 시인인 알렉산드르 푸슈킨이 쓴 '보리스 고두노프'라는 희곡이 있다.16세기 말 러시아에서 차르 자리의 계승권자이던 어린 공자(公子)의 살해를 사주하고 지배자의 자리에 올랐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보리스 고두노프의 고뇌와 몰락을 그린 작품이다.
이 극에서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양심의 가책에도 짓눌리고 있는 고두노프는 "아아 그대는 참으로 무겁구나, 모노마흐의 모자여!"라고 탄식한다.
여기서 '모노마흐의 모자'란 16세기부터 18세기 말까지 모스크바의 차르들이 대관식 때 사용한 왕관으로 차르 권력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 오던 것인데 12세기의 키예프 대공이었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유품이라고 오랫동안 이야기되어 왔다.
15세기 말, 몽골지배를 극복한 이후의 러시아의 차르들은 그들의 통치권의 근거를 비잔티움(동로마) 황제권에서 찾고자 하였다.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는 강력한 통치자이기도 했지만, 바로 비잔티움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 황제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그의 외손자였다고 한다) 러시아 군주들의 특별한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따라서 통치자들의 주변에서는 그가 콘스탄티노스로부터 의관을 선물로 받았다는 이야기가 생겨났다.
차르들은 이 의관을 착용하고 대관식을 올림으로써 비잔티움 황제권을 계승할 수 있다고 자부한 것이리라.
그러나 '모노마흐의 모자'는 실제로는 콘스탄티노스의 선물도 아니고, 12세기에 제작된 것도 아니라고 한다.
모스크바 크렘린 내 특별 전시실에 소장되어 있는 이 관은 이스탄불 성소피아 사원의 벽화에 그려진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 황제가 쓴 제관과 전혀 다른 형태이다.
학자들은 '모노마흐의 모자'는 바로 몽골제국 지배의 유산일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13세기 말 혹은 14세기 초에, 당시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금장한국(킵차크한국)의 칸인 우즈벡(1313~1341)이 모스크바의 통치자인 이반1세에게 내린 선물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인들이 몽골인의 침입을 처음으로 받은 것은 1222년, 서쪽으로 원정가던 몽골 군대가 도중에 러시아 남부 지역을 휩쓸면서였다.
이 때 몽골 군대는 유목민들이었던 폴로베츠(킵차크)인들과 러시아인들로 구성된 연합군을 칼카 강변에서 격파하고 서쪽으로 사라졌으나 그 후 1237년에 다시 나타나 러시아 땅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여러 공령으로 분열되어 서로 싸우며 역량을 소진시키고 있었던 러시아인들은 압도적인 몽골 기마군대의 무력 앞에 저항을 시도해 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러시아 군대는 지배계급 출신으로 구성된 소수의 기마 무인들과 농민들로부터 차출된 보병들로 이루어졌는데, 몽골군의 특유한 압축포위작전에 대해서는 전혀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랴잔을 시작으로 블라디미르, 수즈달, 모스크바 등 러시아 동북부의 도시들이 몽골군의 침입을 받고 짧게는 며칠만에, 길게는 몇 주일 만에 모두 함락되었고 1240년에는 마침내 키예프가 함락되었다.
이른바 키예프시대가 막을 내리고 1480년까지 계속될 몽골-타타르 지배기가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흔히 몽골인을 타타르인으로 통칭하였다.)
키예프 루시의 무인들도 때로는 매우 잔혹하였지만, 몽골군대는 정복전쟁 중 자신에게 저항하는 세력에게는 정말 잔인한 군대였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항복치 않는 주민들은 몰살해 버렸다. 키예프 함락 당시 상황에 대해서도 당대인들은 키예프인들의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고 표현하고 있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사회과학적인 분석을 할 줄도 몰랐고 몽골인들로 인한 피해가 너무나 엄청나 이를 인간적인 원인으로는 설명할 수도 없었던 때문인지 러시아의 연대기 작가들은 몽골인들의 습격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신이 내린 징벌이라 기록하였다.
외부세력의 침입을 부도덕과 타락에 대한 신의 징벌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바람처럼 나타난 몽골 군대를 처음 대하였을 때 러시아인들은 그야말로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는 심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제국을 수립한 칭기즈칸의 후예들은 광대한 제국의 분국을 나누어 맡아 통치했는데 러시아를 지배한 것은 남동쪽 초원지대에 자리한 금장한국이었다.
이 나라의 칸이 대공을 비롯한 러시아인 공들의 즉위에 대한 인준권을 가지고 있었고, 초기에는 러시아 땅에 직접 금장한국의 징세관(다루가: 이는 고려에 파견된 몽골인 다루가치와 같은 말이다)이 파견되어 몽골군대에 복무할 병사를 징집하고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그러나 러시아 민중의 저항에 부딪친 후에는 이들은 물러나고 징병제는 철폐되었으며 러시아인 대공이 정해진 액수의 세금을 거두어 칸에게 바쳤다.
몽골인들은 러시아인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였고, 평화가 회복된 이후에는 러시아인들과 몽골인들 사이에 활발한 교역도 이루어졌으므로 몽골인들의 지배 자체는 항상 그렇게 가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에게 몽골-타타르의 지배는 기본적으로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었다. 몽골 지배에 대한 저항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의 공들이 아니라 경제적 부담에 짓눌린 민중이었으며, 공들은 처음에는 민중의 저항을 억압하거나 혹은 마지못해 민중의 저항을 추인하는 정도였지만, 내부분열로 인해 금장한국의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하자 스스로도 본격적인 저항에 나서게 되었다.
비록 러시아의 독립으로 바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모스크바 대공인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1380년의 어느 날 쿨리코보 평원 전투에서 타르타르 군대를 격파한 것을 러시아인들이 민족적인 대사건으로 기리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그처럼 증오의 대상인 타타르 칸이 선사한 왕관을 러시아의 차르들이 대대로 대관식 때 사용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왜 러시아의 군주들은 독립 후 새로운 왕관을 제작하거나, 키예프시대 대공의 관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러시아의 군주들은 몽골-타타르인들의 지배를 받는 동안 그들을 증오하면서도 그들이 세운 강력한 국가, 강력한 군주권은 크게 부러워하였음에 틀림없다.
분열되어 있던 키예프 루시는 영토의 통일과 확대를 지향하고 있던 새 러시아의 군주들에게는 더 이상 모범이 아니었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에게 종교와 고급문화를 전해 준 비잔티움제국은 이념적으로 지향해야 할 곳이기는 하였으나 13세기 이후에는 영락한 소국에 불과하였고, 더구나 1453년에는 멸망해 버렸다.
이에 비하면 몽골제국은 러시아 군주들이 그 군주의 강력한 통치권을 직접 경험하였고 제국의 행정체계도 관찰할 수 있었다.
러시아 군주들이 타르타르 군주가 내려준 관을 사용한 것은 현실적으로 몽골제국의 군주와 같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명분상 그것을 표방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 관이 비잔티움 황제의 선물이라는 이야기를 지어냈을 것이다.
'모노마흐의 모자'는 이념적으로는 비잔티움의 정신성을 계승하고자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신의 징벌'로 여겨졌던 몽골제국의 대세력을 이어받고자 하던 러시아 군주들의 야심의 이율배반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후원 삼성전자
■"러시아것-몽골것 구분은 의미없어요"
러시아 곳곳에는 몽골의 침략에 대한 옛 러시아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흔적들이 있다. 노브고로드 시가지 중심부에 있는 러시아 1,000년 기념물. 러시아 창시자인 류릭의 도래(866년)를 기념해 1862년 만든 이 종 모양 기념물에는 러시아 영웅 4명의 동상이 둘러싸고 있다.
그 중 한명이 바로 쿨리코보 전투에서 몽골군을 무찌른 드미트리 돈스코이다. 몽골군을 짓밟고 있는 돈스코이 옆에 있는 이가 이반3세. 몽골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차르이다.
나머지 2명은 류릭, 서구화를 이끈 표트르대제이니 몽골의 영향이 얼마나 큰 지 짐작할 수 있다.
몽골과의 대접전이 있었던 블라디미르와 수즈달은 지금은 당시 혹독한 전투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전원도시들. 대신 이콘의 형태로 몽골 저항이 표현돼있다.
블라디미르 우스펜스키사원의 천장에는 1408년 이콘(성화)의 대가 안드레이 류블로프와 동료들이 그렸다는 천장화가 있다.
성경 묵시록에 나오는 동물 4마리가 등장하는데 '안티 크리스트(적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뿔 달린 괴수가 바로 몽골을 상징한다고 수도원 관계자들은 일러준다.
수즈달 예프피미예프수도원에는 '에프로시니아수즈달스카야'라는 수녀의 이콘이 있다. 18세기에 그려진 이 이콘의 주인공은 1238년 몽골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당시 수도원이 화를 면하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러나 지금 러시아인들은 몽골에 무감각하다. 수즈달에서 만난 한 청년은 "몽골 침략요? 저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 느낌이 없는데요"라고 답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지박물관의 제이말 타마라 이보노브나 학예관은 "몽골의 침략으로 러시아인의 몸에는 몽골의 피가 많이 섞이게 됐습니다. 이제 러시아에서 러시아 것과 몽골 것을 구분하는 일은 큰 의미가 없지요"라고 설명했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