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눈은 서설(瑞雪)이지만 지나치면 폭설이다. 폭설은 재해를 몰고 온다.우리의 2001년은 '정치 재해'로 시작하고 있다. 국민을 이렇게까지 절망하게 할 수 없다. 오가는 말들만으로는 일찍이 '개판'명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난장판'이다.
정치 지도자들 입에서 막말이 쏟아져 나오고, 기상천외한 '작전'과 꼼수가 횡행하며, 어디에서도 '네탓'만이 남아 있다.
모두 제 정신이 아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제야말로 진정한 21세기의 시작"이라고 말했던 데는 다소간의 보상심리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새 밀레니엄이다, 새 세기다 해서 법석을 떨었던 2000년을 워낙 부끄럽게 보냈기 때문이다. 한번 더 '제대로 시작하는' 재수(再修)의 기회로 삼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통령도 모처럼 경제사정 악화에 대해 국민에게 '반성'을 표시하고, 야당 지도자는 '조건없는 등원'결단으로 통큰 유연성을 과시하던 터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어느 개인, 어느 정당만이 아니라 어떤 국가에 있어서도 '변화'만이 생존의 조건임을 비로소 인식한 듯이 보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해가 바뀌면서 무슨 일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우리 모두 잘 아는대로다. '변화'는 없고, '변고'가 있었다. 여야 당총재는 국민의 한가닥 희망 속에서 대좌했으나 '대화'는 없었다.
내말 뱉어낼 입만 있을 뿐 남말 들어줄 귀는 없으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만나는가. 그나마도 그 발언록은 국민의 실망만을 가중시키는 '실언록'이다.
대충 이렇다.
"한나라당이 국회법 처리에 응한다면 자민련으로 간 의원들을 도로 데려올 수 있다"고 한다.
"안기부 예산의 선거자금 유입수사를 중단하라"는 요구도 있다. 소도 벌린 입을 다물기 힘들어 할지 모른다. 둘 다 상식 밖이다.
또 한가닥 기대로 남았던 대통령의 호주머니 속 정국 쇄신 프로그램은 결국 DJP공조 복원으로 드러났다. 수적 우세로 몰아붙이겠다는 '힘 정치'의 선언인 셈이다.
이제 더 이상 상생정치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막가파'정국이다. 기세싸움 수준이 아니라 가파른 적개심이 곳곳에 숨어 있다. 정적(政敵)은 어디에나 어느 때나 있는 법이지만 '죽이기'나 '사생결단'은 정치용어도 민주주의도 아니다.
대통령 '법선(法選)'으로 유례없는 홍역을 치른 미국은 6일 유권자 투표에서는 이기고 선거인단 투표에서 진 앨 고어 낙선자가 상원의장 자격으로 조지 W 부시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공식 인증하는 상ㆍ하원 합동회의를 주재함으로써 2001년의 출발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그는 그의 '정적'과 미국의 장래에 하늘의 축복을 빌었다.
같은 날 일본에서는 이제까지 1부22성청(省廳)이던 정부를 1부12성청으로 '구조조정'한 새시스템이 작동되기 시작했다. 대장성(大藏省)과 통산성의 이름까지 없애버린 대개혁이다.
잦은 자질 시비에도 불구하고 모리 요시로 총리는 지금 비전있는 21세기를 뚝심있게 열어젖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안타까운 것은 소수정권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끝끝내 실패한 우리 정부, 원내 제1당의 정치력을 한번도 보여주지 못하는 우리 야당의 무능이다. 그들의 잃어버린 21세기 비전이다.
DJP공조 복원은 국민의 정부의 개혁의지가 확실하게 물 건너갔음을 뜻한다. 인권으로 노벨상을 받았으나 인권법 등 이른바 개혁3법은 팽개쳐졌고, 명동성당 계단에는 오늘도 인권법 청원 단식농성자들이 폭설 속에 팽개쳐져 있다.
'너 죽고 나 산다'의 아집과 미망(迷妄)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우리 정치의 21세기는 또 한번 희망이 없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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