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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 소설집 '얼음가시' / 시린땅 러시아에서 깊어지는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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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 소설집 '얼음가시' / 시린땅 러시아에서 깊어지는 고독

입력
2001.0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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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소설가 이나미(40)씨에 이르러 우리 소설은 또 한번 영역을 넓힌 듯하다. 그의 소설집 '얼음가시'(자인 발행)는 러시아라는 낯설고 광활한 세계를 성큼 한국 소설의 영역으로 편입시킨다.이씨는 '추위라는 이름을 빌린 인간의 저 깊은 고독, 시린 외로움, 빌어먹을 우울'을 추위처럼 냉혹한 문체로 길어 올렸다.

'얼음가시'는 그의 첫 창작집이다. 여기 실린 세 편의 작품 '자오선' '바비에 레토' '얼음가시'는 그간 문예지 등에 전혀 발표되지 않은 소설들이다.

그는 1988년 등단한 뒤 '실크로드의 자유인' 등 두 편의 장편만 발표했다. 30대의 중반에 자신이 유학생으로 러시아에서 겪었던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시절'을 그는 안으로 농익히고 삭이다 12년만에 낸 첫 창작집 '얼음가시'로 풀어놓았다.

그는 옐친의 쿠데타가 있던 1991년 12월을 전후한 1년, 그리고 93년부터 96년까지 합쳐서 4년여를 러시아에서 공부했다.

서울예대 문창과를 졸업한 뒤 "젊은 시절 빠져버렸던 19세기 러시아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그는 모스크바의 고리키문학대학 소설창작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는 격동기의 러시아에서, 외로운 이방인으로 겪은 그 땅의 '혼란과 배타와 황폐와 무방비'를 귀국한 뒤 소설화했다.

'얼음가시'에 실린 작품들은 이 같은 경험을 담은 개인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인간 존재 보편의 깊은 심연과 상처,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근래 드문 수작으로 읽힌다.

'자오선'의 주인공 한준서는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러시아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작품에 매료당해 모스크바 국립영화예술대학으로 유학한 그가 러시아에서 5년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겪은 '추위와 배고픔과 고독'으로 동료 기숙사생을 칼로 찌르는 우발적 사건에 휘말려들고 만다는 줄거리다.

작가는 이 사건을 한준서의 심리상태와 러시아의 백야(白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향수'의 내용에 절묘한 구성과 문체로 교직시켜 인간의 성숙을 위한 통과 제의로 보여준다.

표제작 '얼음가시'의 주인공은 러시아문학을 공부하러 온 노준과 왕년의 공훈예술가 미하일, 여인 올랴 세 사람이 주인공이다. 노준은 낯선 땅에서 소통의 불가능 때문에 고통받는다.

미하일은 90년대 러시아의 허울뿐인 개혁과 개방 이후 자신의 과거가 몽땅 부정되면서 화구도 구하지 못하고 길에서 주운 베니어판에다 그림을 그려야 하는 화가다.

올랴는 아버지뻘 되는 미국 남자를 애인으로 두고 노준을 만나는 젊은 여인이다. 모두 인생의 상실감에 파묻힌 인물들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미하일은 새해 맞이를 위해 자신을 찾아온 노준에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게 뭔 줄 아나? 나 자신, 바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야."

최근의 우리 소설에도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소설의 배면이거나, 스쳐 지나가는 기행의 대상일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러시아라는 삶의 공간의 의미를 보편적 소설문법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내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떠났던 그곳 어디에서도 나는 자유롭지 못했고, 귀국 후에도 그 시절은 너무 징그럽게 들러붙어 있었다"면서도 "이제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었던 내 안의 그 시절을 밀어내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모교인 서울예대와 명지대에서 소설창작, 러시아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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