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0년(Lost Decade)-. 처참한 경제위기로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린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국가들의 1980년대를 일컫는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잃어버린 10년'은 90년대에도 끝나지 않았고, 21세기를 맞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고통스런 운명을 겪고 있는 것일까.
유전발견.선거때마다 개혁 '도로아미타불'
■ 멕시코
멕시코는 재정적자(71년 1%→76년 4.1%)와 외채(70억달러→259억달러)로 일궈낸 고도성장의 한계가 70년대 중반부터 노출되자 급기야 76년 국제통화기금(IMF)에 SOS를 타전해야 했다.
하지만 대규모 유전발견과 유가폭등으로 하루아침에 풍요를 맛보게되자, IMF 개혁프로그램을 '없던 일'로 됐다.
그 결과 82년 재정적자 비율은 15.7%까지 높아졌고, 외채는 753억달러(81년)까지 폭증했다.
2차 오일쇼크 이후 국제유가 하락과 국제금리 상승은 '석유만 믿고 빚으로 흥청망청댔던' 멕시코에 대규모 자본이탈과 환율폭등, 외환보유액 고갈이라는 쓰라림을 안겼고 마침내 82년8월 대외지불유예(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이어졌다.
82년 환란과 함께 출범한 마드리드 정권은 긴축을 통한 경제재건 계획을 추진했지만, 85년 주지사ㆍ지방의회 선거를 맞아 '표를 위한 재정지출확대'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7%대까지 떨어졌던 재정적자는 87년 다시 15%선까지 올라갔고, 인플레가 연 159%에 달한 가운데 증시 및 페소화 가치의 폭락이 빚어지면서 5년만에 경제위기를 다시 맞게 됐다.
88년 등장한 살리나스 정권도 처음엔 최저임금 동결, 성장 억제, 공기업 민영화, 금리자유화 등 개혁ㆍ개방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감독장치 없는 금융자유화는 대량부실을 양산했고, '쓰고 보자' 심리 속에 저축률 하락(88년 17.5%→91년 9.7%)은 경상수지 적자를 확대시켰다.
특히 집단이기주의 및 정치불안 와중에서 94년 대선을 앞둔 집권세력은 정치적 인기를 위해 페소화 절하압력을 외면하는 패착을 둠으로써, 결국 또 한번 외환위기를 맞아야 했다.
임금인상등 무작정 수용 재정증발정책 잇달아
■ 브라질
멕시코가 그랬던 것처럼 브라질도 고도성장의 대가인 재정적자와 외채가 폭발하면서 82년 IMF체제로 들어갔다.
오랜 군정 끝에 85년 처음 출범한 문민정권은 화폐개혁, 가격동결 등 비상조치를 강구했지만, 시장수급을 외면한 환율동결 정책은 경상수지 적자와 외채구조를 더욱 악화시켰다.
특히 인기영합 정책을 남발, 노동자의 임금인상 및 권리요구를 무작정 수용해 인플레를 부추겼고 공무원 채용과 급여도 마구 늘렸다.
정부지출의 80%가 인건비로 탕진될 정도였다. 결국 브라질은 87년 모라토리엄→89년 금융위기로 곤두박질쳤고, 87~92년엔 평균성장 0.6%에 물가는 최고 1,783% 달하는 '살인적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고물가)' 터널을 거쳐야 했다.
94년 멕시코 환란 여파로 큰 홍역을 치른 브라질은 카르도주 대통령 주도하에 재정긴축, 사회간접자본의 정부독점 폐지, 무역자유화 등 본격적 경제개혁을 추진했고, 94년 2,490%에 달했던 인플레를 98년 0.2%까지 떨어뜨렸다.
그러나 정치가 또 다시 발목을 잡았다. 98년 대선을 앞두고 표를 의식한 재정증발 정책(적자비율 94년 4.9%→98년 8%)이 잇따랐고, 기득권세력의 반발과 러시아 모라토리엄까지 겹치면서 98년11월 IMF체제로 돌아가야 했다.
너무강한 노조앞에 정부저책도 맥못춰
■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는 '포퓰리즘(Populism:대중영합주의)'의 극치인 '페론이즘(페론 전 대통령의 대중지향적 정책)'의 발원지다. '노동자를 위해' 실제로 돈을 길에 뿌렸던 일화도 있다. 덕분에 노조와 이익집단의 힘은 막강했다.
83년 IMF체제 개막직후 출범한 알폰신 문민정부는 노조의 정치적 영향력과 임금ㆍ파업권 축소를 위한 입법을 시도했으나, 페론주의자들의 거센 저항으로 뜻을 관철할 수 없었다.
임금동결, 공공부문 인력감축, 통화ㆍ재정긴축도 역시 무산됐고, 결국 88~89년 다시 IMF로 회귀할 수 밖에 없었다.
94년과 98년, 그리고 2000년에도 경상수지 악화와 자본이탈, 지방정부들의 방만한 재정운용이 겹치면서 아르헨티나는 경제위기를 겪었다.
사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중남미 국가들의 포퓰리즘 저변에는 극심한 부의 왜곡이 깔려있다. 아르헨티나의 지니계수(1에 가까울수록 소득불균형이 심함)는 80년 0.38에서 97년엔 0.44로 악화했고, 브라질도 79년 0.49→90년 0.53→96년 0.54, 멕시코도 84년 0.32→96년 0.39로 높아졌다.
빈부격차의 확대는 국민적 합의도출은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이는 극단적 집단이기주의와 도덕적 해이로 이어졌다.
또 상대적 빈곤감은 국민들의 저축의욕을 떨어뜨려 저축률하락→경상수지악화→외채증가의 악순환을 야기했고, 자본시장이 완전 개방된 상태에서 '환란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핫머니의 손쉬운 사냥감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중남미 실패가 주는 교훈
중남미 실패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큰 교훈은 "일단 개혁을 시작하면, 경제 시스템이 완전히 바뀔 때까지 철저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남미에 위기가 주기적으로 재발하고, 그 때마다 개혁이 첫 페이지부터 다시 시작된 것도 정부가 이해집단에 밀리고 인기에 영합하면서 개혁이 누차 중단됐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먼저 정치논리에 경제가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점이 확인된다. 중남미 국가들은 위기 초기에는 재정개혁을 추진하다가도 선거 전후로 세출을 확대하고 개혁의 고삐를 늦추었다.
1980년대 이후 네 차례에 걸친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의 금융위기 발생 연도가 대통령 선거와 거의 일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둘째 경상수지 방어가 필수적이다. 중남미 국가들은 위기가 진정되면 어김없이 팽창ㆍ성장정책을 추진, 자산가격 거품화, 소비와 수입의 급증, 경상수지가 악화를 초래했다.
특히 금융기관에 대한 불신으로 민간저축률이 낮아 해외자본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았고, 이에 따른 급격한 자본유출은 곧바로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셋째 방만한 재정과 공공개혁 지연은 경제 전 부문의 개혁을 이완시킨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났다. 중남미 국가들은 80년대 중반이후 공기업 민영화를 적극 추진했지만 정치권과 노조의 저항에 부딪쳐 90년대 초반부터는 그 실적이 지지부진했고 방만한 재정운용은 공무원들의 도덕적 해이를 심화시켰다.
넷째 빈부격차 심화가 위기를 부채질한다는 점이다. 80년대 이후 중남미의 소득불평등도는 중동ㆍ동아시아 등 세계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았고 이는 90년대 들어 더욱 악화했다.
빈부격차는 위기국면에서 개혁에 대한 국민적 합의 도출은 불가능하게 했고 사회불안을 부채질,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물론 지금의 한국 경제는 중남미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외환보유액이 962억달러에 달하고 정부가 경기부양책을 계획하고 있지만 선(先)구조조정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조건은 올해가 더욱 열악하다"며 "정부가 스케줄에 집착, 서둘러 개혁 완료를 선언한다면 우리나라도 남미형 위기재발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중남미의 이단아' 모범생 칠레
칠레는 중남미의 '모범적 이단아'다. 4~5년 주기로 위기를 반복하는 인접국들과는 달리, 칠레엔 1980년대 중반 이후 대형 환란이 없었다.
성공비결은 한발 앞선 개혁과 경제정책의 일관성에 있다. 70년대 중반 집권한 피노체트 정권은 악명높은 인권탄압에도 불구, '시카고 보이즈(Chicago Boys:시카고대 출신의 칠레 경제학자들)'에 경제의 전권을 위임해 고강도 안정화ㆍ개방시책을 추진함으로써 칠레 경제발전에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82년 칠레도 자본이탈과 환율폭등을 이어진 경제위기를 맞아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다.
그러나 IMF 프로그램을 착실히 이행, ▦공기업 민영화를 통해 공기업의 국내총생산(GDP)내 비중을 81년 24%에서 89년 7.5%까지 낮췄고 ▦83년 3개은행 파산조치와 국영은행 민영화 조치를 내렸으며 ▦핫머니보다는 직접투자자금 유치를 위해 외국인투자절차를 대폭 간소화했다.
90년대 문민정권 출범 후에도 법인ㆍ부가가치세 인상 및 전력ㆍ통신ㆍ의약ㆍ석유ㆍ제당 등 주요 공기업 민영화를 통한 재정 건전화, 외환거래시 세이프가드 장치구축, 관세율 인하를 통한 수입개방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현재의 칠레 경제가 완전한 위기면역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지만 국가별 청렴도 조사(98년)에서 칠레는 85개국중 20위로 우리나라(43위)보다도 높은 점수를 받을 만큼 중남미 국가로선 드물게 경제의 안정성과 투명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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