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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잃고, 묽고 희박한'(2)-남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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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잃고, 묽고 희박한'(2)-남문석

입력
2001.01.01 00:00
0 0

"아저씨야말로 애송이군요.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아저씨는 거기에서 시간이 정지했어요. 아저씨는 과거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기회가 되어도 아저씨는 똑같이 자퇴할 겁니다. 앞으로 비슷한 상황에 처해도 비슷한 선택을 할 겁니다. 쩝쩝.."진수는 골목 모퉁이를 돌아 큰 도로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한 손에는 핸드폰을, 다른 손에는 빵을 들고 있었다. 씹고 있던 빵을 삼키고 말했다.

"어떤 갈래를 선택하든 철저히 진실하게만 하면, 그 다음에는 전과는 다른 더 나은 선택을, 전과는 다른 더 나은 동기에 따라, 쩝쩝., 전과는 다른 더 나은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일한이 말 도중에 끼어들었다. "이 녀석이 처처청산유수네." 일한은 억울하게 놈에게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에잇.." 분통이 터졌지만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놈의 페이스에 말려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그런데 방금 수화기에서 난 소리는 놈이 뭔가를 먹는 소리가 아닌가. 뭔가 결단을 내려야겠다. "너, 결국 아무 것도 돌려주지 않을 거지?"

"돌려 줘야죠"라고 진수가 말했을 때는, 이미 전화가 끊어진 뒤였다.

일한은 공중전화기 위에 빵과 우유를 얹어 놓고 재다이얼 단추를 눌렀다. 신호가 가는 동안 좌우로 서성였다. 놈에게 내가 당하고 있다. 이놈은 입만 살아서 그럴듯하게 나불대지만. 맙소사, 지금까지 내가 도둑놈하고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너, 자꾸 전화 끊을 거야?" 진수가 전화를 받자마자 일한이 말했다.

"제가 안 끊었어요. 전화가 자꾸 끊어져요."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이상한 놈이구나. 지금 날 놀리고 있지?"

"도둑질을 했지만. 거짓말은 안 합니다."

"정직하다? 지나가는 개가 웃겠군. 난 처음부터 믿지 않았어. 어디, 믿을 사람이 없어 도둑놈 말을 믿어? 내 핸드폰은 내가 잘 알아. 적어도 너보다 정직해."

"제가 거짓말해서 뭣하겠어요? 다시 볼 일이 없는 사람과 전화통화를 하는 건데."

"뭐라고? 넌 오늘 내 손에 잡히면 죽어." 일한은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었다.

"네가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그건 너란 놈이 원래 그런 놈이니까. 아니면 음, 넌 지금 시간을 끌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는 도중에 또 전화가 끊어졌다. 일한이 불쑥 말하고 나서 자신이 한 말을 되새겨 보니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놈은 이동전화로 통화를 하고 나는 붙박이 전화로 통화를 한다. 이놈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고, 시간을 끌고 있는 거야. 징기스칸 부대가 이동하면서 말 젖을 먹었듯이, 이놈은 날 묶어 둔 채 자신은 움직이며 빵까지 먹고 있었던 거야. 고단수야. 처음부터, 햇볕정책이고 나발이고 간에 성질대로 했어야 했어. 놈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죄송해요. 제가 안 끊었어요"라고 진수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전화가 다시 끊어졌다.

일한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진수가 말하도록 내버려두며 상대편 소음을 들었다.

도로다.

계속 소음에 주의를 기울이며 무의식중에 빵을 베어 물고 고개를 든다. 이때, 큰길을 따라 멀리서 걸어오는 낯설지 않은 청년을 보았다. 청년이 그놈인지 확인하느라 말을 자주 끊는다. "나한테, 잡, 히면.." 일한은 시간을 끌었다. "너, 말이야.."라고 말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소리쳤다. "전화 끊지 마!" 씹던 빵이 입에서 튀어 나왔다.

진수는 뒤돌아서 달아났다. 추적자는 빨리도 쫓아 왔고, 오르막길이라서 진수는 숨이 가빴다. 굉장히 빠른 아저씨다. 내리막길에 접어들자마자 진수는 옆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는데, 들어가서 보니 막다른 골목이었다.

일한이 옆 골목 입구까지 왔을 때 놈은 사라지고 없었다. 행인에게 물어 보려고 하는데 옆 골목에서 쿵하는 소리가 났다. 놈이 담을 넘고 있었다. 담을 넘은 진수는 옆 담을 끼고 돌아가서 뒷집 담도 넘었다. 뒷집마당을 가로질러 다시 담을 넘을 때 되돌아 보니 추적자가 첫 담을 넘고 있었다.

진수가 큰 도로로 나왔을 때는 뒤돌아보며 뛰었다. 그 뒤에는 일한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평지로 접어들어 오토바이 상사 앞에 세워 둔 자전거에 진수가 부딪혀 비틀거렸고, 자전거는 조금 구르다가 옆으로 넘어졌다.

이때 일한이 그것을 보고 자전거가 잠겨 있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자전거를 타고 도망가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어 거의 추격을 포기하려고 하는데, 도망자는 자전거를 두고 그냥 뛰어갔다.

자전거가 넘어진 곳에까지 온 일한이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고 그기에 올라탔다. 자전거는, 평지를 가다가 내리막길에 이르자 쏜살같이 내리 닫았다. 뒷덜미가 서늘하여 뒤돌아보던 진수는 놀라서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내리닫는 탄력을 이용해 일한은 자전거에서 풀쩍 뛰어 뒤돌아보는 진수를 덮쳤다. 악! 하는 소리가 나고 둘은 함께 나동그라졌다.

자전거도 길 한가운데 넘어졌다. 일한이 진수를 내리치려고 하자 길 가던 여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진수가 일한에게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급히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때리지 마세요." 일한이 잠시 망설이다가 주먹을 내리고, 멱살을 붙잡고 진수를 일으켜 세웠다. "또 도망가면 죽어." 일한이 말했다. 시장 바구니를 든 아주머니가 이들을 말리려고 했지만, 잠시 지켜보더니 안심하고 그냥 지나갔다.

"도망가지 않을게요. 그런데," 진수가 말했다. 손가락으로 일한의 등뒤를 가리켰다. "어, 저 뒤에 자전거.."라고 말하며 급히 움직였고, 일한이 주먹을 둘러치자 진수가 뒤로 쓰러졌다. 빵빵-. 일한이 경적 소리에 놀라서 돌아보니, 모래를 실은 덤프트럭이 물을 뚝뚝 흘리며, 넘어진 자전거를 뭉개고 지나갈 기세로 서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너, 학교 도서관마다 돌아다니면서 물건 훔치는 놈이지?" 일한이 말했다. 일한은, 놈이 앉은 자세에서 갑자기 튀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가부좌 자세로 앉히고, 놈의 주머니를 뒤졌는데 학생증이 나왔다.

"다른 학생증도 다 내봐."

"없어요." 진수가 한쪽 뺨을 손으로 감싼 채 대답했다. "그 학생증 제거예요."

"넌 오늘 임자 만난 거야. 여기는 내가 다녔던 학교야. 그냥 꺼낼래, 입에 피 물고 꺼낼래?" 라고 일한이 으르며 놈을 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울상이었다.

가부좌 자세로 앉은 녀석의 꼴을 보니 기분이 좀 묘했다. 가부좌는 지극히 개인적인 자세이군.

아니, 자세라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구나. 스스로 하면 보기 좋은 자세가 남을 결박하는 자세로도 쓰일 수 있다니.

"학생증이 너 거라고? 그럼, 학번 한번 대봐." 일한이 학생증을 보며 말했다.

".."

"거봐, 학생일 리 없어. 그럼 좋아, 2차원 평면을 적분하면 어떻게 돼?"라고 묻다가 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냐, 한국에선 지나치게 쉬운 문제야. 온 국민이 미적분을 공부하는 이상한 나라니까. 아니, 확인할 필요도 없어. 넌 어차피 도둑놈이니까." 일한은 다시 찾은 수금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 바로 경찰을 부르지 뭐."

진수를 힐끗 본 일한은 핸드폰 단추를 눌러보다가 중얼거렸다. "밧데리가 다 됐잖아." 일한은 핸드폰 폴더를 닫으며 진수에게 말했다. "아까 왜 밧데리가 다 됐다고 말하지 않았지?" 잠시 뒤에 진수가 대답했다. "몰랐어요." 그리고 진수가 말을 더듬더듬하며 어눌하게 말했다.

"핸드폰을, 처음 써 봤어요." "핸드폰을 처음 써 봤다고?" 일한이 말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핸드폰 세상에서 핸드폰 없이 사는 인간이란, 그리고 그 인간이 사는 생활이란 도대체 어떤 거지? 핸드폰을 쓴 지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 생활을 기억조차 할 수 없군.' 중얼거리고 나서

"다른 건 몰라도 내 핸드폰은 밧데리가 거의 없으면"이라고 일한은 먼산을 보았다. "아까 때린 건. 자식, 말을 하지. 난 도망가는 줄 알았잖아, 아무튼.." 잠시 뒤 진수의 학생증을 다시 보았다.

"이진수. 환경공학과 구구, 비둘기 학번. 네가?" 일한이 진수를 보며 말했다. "똥물을 맑게 하기는커녕, 이런 놈들이 이 사회를 더럽히는 거야. 이런 놈들은 소각장에서 환경공학적으로 다뤄야,"라고 말하고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말을 잇기는 했다. "하는데.."

"."

일한은 진수의 청바지를 보고 있었다. 무릎뿐만 아니라 바지 전체에, 방금 산탄총을 맞은 것처럼 구멍이 나 있었는데, 찢은 것에 비해 비교적 깔끔했고, 그 구멍 속으로 뽀얀 맨살이 보였다. 염산자국이라고 했던가?

"청바지를 어떻게 염산으로 태웠다고 했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과 실험실에서 매일 실험을 도와주는데, 염산이 튀는 것 같이 험한 일은 저 같은 아르바이트생을 시키죠. 가운을 걸쳐도 소용없어요. 두꺼운 청바지도 뚫을 정도로 독한데요, 뭐."

일한이 손으로 허벅지에 난 큰 구멍을 헤쳐 맨살을 자세히 보니, 과연 불에 덴 자국처럼 피부가 벗겨지고 속살이 발갛게 드러나 울퉁불퉁하니 흉이 굳어 있었다.

해가 지고 주위는 어두워졌다. 일한이 진수에게 담배를 권했다. 진수는 고개를 가로저어 거절하고 나서, 혼자 중얼거리듯 물었다. "죗값은 치러야겠죠?" 일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담배를 입에 물려다 그냥 주머니에 집어넣고,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다.

진수도 일어섰고, 일한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동안 서로 눈길을 피하지 않고 바라봤다.

언덕으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며 뒤따라오는 진수에게 일한이 물었다. "왜 아까 자전거를 타고 도망가지 않았지? 자전거를 타고 도망갔으면 난 널 포기했을 거야." 진수가 대답이 없어서 일한이 다시 물었다. "어지간히 급했구나?"

"자전거를 못 타요."

"뭐? 다시 말해 봐."

"자전거를 못 타요."

일한은 말없이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아버지가 많으니 자전거를 배워도 많이 배웠겠다고 농담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하지 않았다. 자전거를 배우지 못했다. 속으로만 그 말을 뇌까렸다. 이거, 굉장히 미안한데. 전화로 한 말들이 모두 사실이잖아. 배고파서 빵 훔친 녀석을 돌로 쳐죽인 꼴이야.

그 동안 아까 자전거가 넘어졌던 곳에 거의 다 왔고, 오토바이 상사 근처에는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사내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일한이 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봤다. 일한이 있는 쪽은 어두운 곳에 있어 그쪽을 잘 볼 수 있지만 그쪽에서는 이쪽을 잘 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이쪽을 가리키자 사내들이 일제히 이쪽을 쳐다보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 가운데 누군가가 크게 말했다. "저 자전거 아냐?" "맞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또 누군가는 욕을 했다. 여기저기서 욕이 터져 나오며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언제 자전거를 탔는지, 일한은 자전거 안장에 앉아 진수에게 수금가방을 던지며 급히 말했다.

"뒤에 타."

"도둑이야, 도둑 잡아라!"

"거기 서!" 뒤에서 사내들이 소리치며 악을 썼다.

"꽉 잡아." 일한은 자전거를 몰아 내리막을 달렸다. 자전거는 두 사람의 무게 때문에 일한이 진수를 추격할 때보다 더 빨리 달렸다. 길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이 놀라서 비켜섰다. 그때 도망쳐 온 언덕에서 오토바이 여러 대가 거의 동시에 시동 거는 소리가 났다. 진수가 소리쳤다. "아저씨, 오토바이로 쫓아오는가 봐요. 골목으로 빠져요."

일한이 핸들을 꺾어 골목으로 들어갔고, 진수와 함께 불꺼진 집 담 너머로 자전거를 넘겼다.

서로 도와 담을 넘을 때 개집에서 개가 나와 짖었다. 담을 넘은 일한이 손을 털고 개집을 걷어차자, 개는 깨갱거리고 개집으로 들어가 짖어 댔다. 오토바이 소리와 경적 소리가 요란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빵으로 개를 달랬고, 개에게 빵을 조금씩 던져 주며 담벼락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담 너머 골목에서는 오토바이를 타며 골목을 누비는 사내들 목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들, 잡히면 제삿날이야. 칼치 형님 그랜거를 업어가다니." 누군가 오토바이를 세우는 듯하더니, 둔탁한 발자국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투벅투벅..' 일한은 담 너머에 주의를 기울이느라 한 손에 빵을 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진수가 일한의 손에 놓인 빵을 집어 조금씩 떼서 개에게 던져 주었다. 빵을 뗄 때마다 가늘게 손이 떨렸지만 진수는 묵묵히 규칙적인 동작을 반복했다. 이를 본 일한의 긴장한 표정에 잠시 미소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분명 여기 어디서 개가 짖었는데.."라고, 허스키가 담벼락 너머로 들렸다. 그때 다시 일군의 오토바이가 골목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꾸물댈 거야? 이 동네 놈들이 아냐.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너희는 저쪽으로, 우리는 이쪽으로!"

일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손을 가늘게 떨고 있는 진수가 어색하게 잠깐 웃어 보이고 개에게 같은 페이스로 빵을 던진다. 이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일한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고, 진수의 어깨를 툭 쳤다. 이제는, 일한이 진수의 손에서 빵을 받아 들자, 진수가 이마의 땀을 닦고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귓속말을 했다.

'아이덴티티 갈아 드릴까요?' 일한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가 생각을 바꾸었는지 '좋아, 기념으로 갈아줘'라고 속삭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데, 넌 왜 굳이 이런 걸 갈아서 뿌옇게 만들어?' 진수가 대답했다.

'탁하게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키힉키힉, 그건 아직 방법이 미숙해서 나타나는 부작용이죠-희미하게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전 진하거나 독한 건 별로. 지나치게 자극적이잖아요. 한번 익숙해지면- 키힉키힉.. 사실 전 그 세계에 익숙하지만-빠져 나오기 힘들어서 그 세계에 얽매이기 십상이에요. 싫어하려 해도 싫어할 수 없고, 점점 그 방향으로 가속이 붙죠. 저절로 말예요. 음, 제가 살고 싶은 세계는, 묽고 희박한 세계예요.'

일한이 생각했다. 이상하고 긴 하루다. 하마터면 몰매를 맞을 뻔하기까지 하며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힘든 줄은 모르겠고, 오늘은 세월이 많이 흘러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날이다.

빵이 떨어지자 개가 으르렁거렸다. 녀석은 자신이 배고픈 짐승일 뿐이라고 항변하는 것 같았다. 골목은 조용했지만 추적을 완전히 따돌린 것 같진 않았다. 멀리서 이따금씩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슬슬 나가 보자. 여기 계속 있다가는 잡히겠다."

"완전히 따돌린 걸까요?" 자전거 뒤에 앉은 진수가 묻자 일한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다시 진수가 물었다. "도망가기도 바쁜데 막걸리는 왜 샀어요?" 일한은 페달을 두어 번 젓고 나서 말했다. "한잔 하자고, 동문끼리." 일한이 뒤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하늘에는 초생달이 떠 있었다. 진수는 추격을 따돌리고, 느긋하게 자전거 뒷자리에 김치를 놓고 일한과 막걸리를 마시게 될 밤 풍경을 머릿속에 그렸다. 묘하게도 가슴이 설?다. 자전거는 긴 내리막길로 내려갔다.

"아저씨가 맞을지도 몰라요. 학교 그만 둘까 봐요." 일한은 묵묵히 페달을 밟았다. "아저씨 말처럼 전 원래 들치기인가 봐요. 학생이기는커녕 도둑질조차 멈출 수 없는 걸요."

"넌 원래 들치기지." 일한이 잠시 후에 다시 말했다. "학생이 들치기를 한 게 아니라, 원래 들치기가 노력해서 학생이 된 거야." 잠시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포기하지 마." 진수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자전거 바람이 시원했다. 그 바람은 청바지 구멍 속으로도 들어왔다.

앞쪽에는 야간에도 공사가 한창인지 멀리서 굴착기 소리가 들렸다. 탕탕탕탕.. 진수는 오른팔로 일한의 허리를 감고 있었고, 왼팔로는 머큐로크롬과 스포츠 마시지 크림이 든 비닐 봉지를 들고 있었다. "빨간약하고 크림은 왜, 누가 다쳤어요?"

"자전거 타는 걸 가르쳐 주려고.. 좀 까지고 멍도 들 거야. 각오 단단히 해. 넌, 오늘밤 안에 자전거를 배우는 거야. "

진수는 일한의 널찍한 등에 이마를 댔다. 등에서 전해 오는 체온이 따뜻했다. "네가 신분증을 자꾸 훔치는 건,"이라고 말하고 일한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바꿔 소리쳤다. "그래, 자전거를 배우면 돼.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일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며 다시 소리쳤다. "네가 말한, 묽고 희박한 세계로 가는 거야!" 일한이 외치는 소리가 등에 귀를 대고 있는 것처럼, 일한의 넓은 등에서 울려 진수의 이마로 전해졌다. "이제 어디, 공터를 찾자고."

공사장 옆을 지나고 있었는데 굴착기가 잠시 멎어 주위가 조용했다. 그때 뒤편 멀리서 오토바이 소리가 났다. 두 사람 눈이 마주쳤다. 점점 가까워지는 오토바이들이 전조등을 깜박였다.

"자전거를 버리고 달아나요. 잡히겠어요."

"그럴 순 없어." 일한이 핸들을 고쳐 잡았다.

일한의 표정을 본 진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굴착기가 암반에 닿은 듯한 소리를 내며 다시 땅을 뚫기 시작했다. 땅땅땅땅.. 뒤쪽에서는 오토바이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텅텅텅텅.. 길은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여서 자전거가 심하게 덜컹댔고, 뒤에 앉은 진수는 온몸이 덜덜거렸다. 그때 저만치 앞쪽에서도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오토바이 여러 대가 나타났다. 그때, 진수가 말했다.

"자전거를 배우고 싶어요." 굴착기 소리 때문에 진수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일한이 묻자, 진수는 일한의 귀에 대고 크게 말했다. "자전거를 배우겠어요." 진수가 크게 말했다. 일한이 속력을 늦추지 않고 계속 페달을 밟자 앞에서 오는 오토바이 한 대가 경적을 울렸다. 나머지 오토바이들도 잇따라 경적을 울리며 정면으로 돌진해 왔다. 빠라빠라빠라빠라..

"안 들려!" 일한이 소리쳤다.

"자전거를 타겠어요!" 진수도 소리쳤다.

"좋아." 일한은 달리는 앞쪽에서, 길을 가던 여자가 길옆으로 재빨리 몸을 피하며, 손을 잡고 있던 아이를 감싸는 것을 봤다.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따라온 오토바이들이 뒤에서 전조등을 교대로 깜빡이자, 진수는 수십 개의 사이키 조명이 번쩍번쩍 비추는 현란하고 몽환적인 테크노 바에 있는 착각이 든다.

자신을 감싼 엄마의 팔 너머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이들을 지켜보던 아이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리기 시작한다. 공간이동 도술을 펼치는 것처럼, 섬광이 점멸할 때마다 자전거를 탄 두 사람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앞으로 성큼성큼 나타나곤 아이 옆을 지나치려 한다. "꽉 잡아!" 일한은 핸들을 잡은 팔에 힘을 주며 진수를 길게 부른다. "이진수-" 진수는 대답 대신 일한의 허리를 껴안는다.

가파른 내리막이었지만 페달을 계속 밟으며 전속력으로 돌진한다. 일한과 진수가 하나가 되고 자전거와도 하나가 되더니 섬광의 점멸이 빨라짐에 따라 뒷모습의 이들이 나타나는 간격이 점점 짧아져 어딘가로 어딘가로 수렴할 때쯤, "우린"이라고 짧게 뱉은 일한이 가슴 부풀도록 숨을 들이마시고, 부셔서 가늘게 눈뜬 진수가 불빛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입을 쩍 벌린 아이가 비명을 지르기 위한 것인 듯 탄성을 지르기 위한 것인 듯 뭔가 소리를 지르기 직전일 때, '타당' 하고 돌이 튀며 자전거가 공중으로 치솟고 부릅뜬 일한의 눈에 전광석화 같은 커다란 빛이 지나간다.

돌파한다!

우렁우렁 밤하늘에 그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질 때쯤, 뿜어진 눈부신 불빛 속으로 뛰어들며 허공에서 잠시 정지한 듯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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