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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 천년 / (14)몽골의 중국지배가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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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 천년 / (14)몽골의 중국지배가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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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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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수도는 왜 중국 땅 북동 끝 변경지대인 베이징(北京)에 자리잡게 되었을까? 중국지도를 볼 때마다 느끼는 의문이다. 96년 1년 동안 나는 베이징에서 생활하였다.베이징 생활 반달을 겨우 넘긴 2월 어느 날 양 허벅지가 온통 튼 것을 발견하고는 기겁을 하였다. 병원을 찾은 나에게 의사는 연고 하나를 주며 베이징에서 반달만 더 생활하면 깨끗하게 없어질 거라며 빙긋이 웃었다.

베이징은 그렇게 건조하다. 수도 베이징은 몽골족의 원나라가 중국인에게 남겨준 유산의 하나이다. 아무 것도 없던 빈터에 돌연 거대도시가 들어선 것은 원나라가 이곳에 수도를 정한 이후부터였다.

베이징의 기후는 여름 한철을 빼면 몽골고원의 날씨와 몇 달의 시차를 두고 있다. 베이징의 가을기후는 7~9월 몽골을 덮었던 대기가 그대로 옮겨와 만든 것이다.

베이징의 겨울은 내몽골의 가을이다. 베이징의 겨울을 온통 덮어버리는 흙바람은 모두 몽골 고비사막에서 날아 온 흙먼지들이다. 지난 여름 답사반은 베이징을 출발하여 원 세조 쿠빌라이가 대칸(大汗)위에 올랐던 상두(上都) 개평부(開平府)의 옛터가 있는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둬룬(多倫)으로 향하였다.

베이징이 몽골초원에서 그렇게 가깝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 베이징을 떠나 금새 옌산(燕山)산맥을 넘게 되었고, 눈앞에는 온통 스님의 머리처럼 반들반들한 초원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유목민인 몽골족이 세운 중원왕조인 원이 왜 베이징(당시의 명칭은 大都)에 수도를 정했는가 쉽게 짐작이 갔다.

원은 이민족이 세운 국가로서 전 중국을 통치한 최초의 왕조였다. 북송 이래 쓰여지지 않던 대운하가 재건됨은 물론 베이징까지 확장되었다. 그것은 수탈을 위한 교통로였지만 남북지역간의 정치 경제 사회적 통일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베이징에는 지금도 시내 곳곳에 호수와 수로가 많다. 남방물자를 수도로 수송하기 위한 조운로의 일부였다. 지금의 자금성 서쪽에 있는 북해 중럼꽁萬~ 지수단(積水潭) 등이 그것이다. 원의 지방조직의 잔재도 상당수 남아 있다.

허난(河南) 산시(陝西) 간쑤(甘肅) 장시(江西) 쓰촨(四川) 원난(雲南)의 6성은 원대의 행중서성(行中書省, 行省)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몽골인이 세계를 정복한 것은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100만 정도의 인구에 불과하였던 그들의 말발굽 앞에 유라시아 거의 대부분 지역에 있던 정권들이 허무하게 쓰러졌다.

그들이 가는 곳은 대학살이 감행되었다. 그들은 도시와 도시인들을 싫어했다. 칭기즈칸의 출현은 중국인에게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야만자의 출현이었다.

칭기즈칸이 1212~1213년 북중국 평원을 가로지르는 대행진을 감행하자 90여 개의 도시가 초토화되어 남은 것은 깨어진 벽돌조각뿐이었고, 1215년 금(金)의 수도 중도(中都)를 약탈했을 때는 한 달 이상이나 불탔다.

몽골시대의 경험과 기억은 유라시아 대부분을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나아가게 했다.

아시아를 주축으로 하여 유럽과 아프리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동서남북으로 4개의 제국이 탄생하여 오랫동안 병립했다.

동에는 명과 청제국이, 서에는 오스만제국, 남에는 티무르제국, 북에는 300여년 몽골지배를 받은 후에 등장한 러시아제국이 그것이다. 동의 명청 제국을 제외하면 대제국의 출현은 새로운 현상이었다.

4개 제국의 출현에는 각각 연관되는 부분은 다르지만 직간접으로 몽골제국과 무관하지 않다. 한편으로 몽골멸망 이후 세계의 흐름은 '육지에서 바다로' '지구의 세계화'로 향해 천천히 그리고 크게 움직임을 시작하는 대전기를 맞고 있었다.

무엇이 그런 대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는가? 그것은 유라시아 전역을 거대한 교역통상권으로 만든 몽골시대 후반의 유산인지 모른다.

특히 원에는 시대를 앞서가는 몽골의 제도들이 도입됐다. 은을 축으로 지폐 등을 교용(交用)하는 화폐경제가 자리잡았으며 통상은 육지와 바다를 관통하며 확장됐다.

500톤급의 배까지 건조할 정도로 조선술이 발전하고 해양에 대한 지식과 시야가 넓고 깊어졌으며 왜구가 민간무역을 주도함으로써 해양무역이 병행해서 발전했다.

그러나 동시에 몽골은 전 중국을 목초지로 바꾸려 했던 것처럼 지구상 최고의 문명국을 제대로 대접할 줄 몰랐다. 인구도 적고 문화수준도 열등한 몽골족들로서는 주도권 상실을 가져올 중국화의 길을 거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출세의 길이 막힌 중국인들은 다른 방면에 재능을 발휘했다. 그 중의 하나가 희곡을 쓰는 일이었다. 중국문학의 새로운 분야가 열렸으며 무대예술의 황금시대가 시작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 때문에 중국인들은 몽골이 다스린 90년을 암흑기로 생각했다. 몽골이 중국에 남긴 것은 결국 그 '반작용'이 더 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나라 대부분의 땅을 인수한 명제국은 사실 쿠빌라이 시대 이후 싹 틔어 성장해가던 위대한 전환적 요소들을 대부분 압살했다. 이것은 나중에 세계사에서 동양과 서양의 힘이 역전하고 서유럽은 동방과 세계로 침략하는 두 가지 결정적 전환을 빚는 동인이 됐다.

명왕조는 '내부지향적'인 존재였다. 경제운용과 통화관리에 무지한 명정권 하에서 은과 지폐 교용제는 전혀 작동되질 않았다. 해금(海禁)과 감합무역(勘合貿易)정책으로 일반 백성은 바다를 외면해야 했고, 무역은 국가가 정한 통상단체에게만 한정되었다.

조선술과 해양지식은 위축되고 왜구는 정권의 압살로 해도(海盜)로 변했다. 마치 중국문화가 외부인에 의해 오염되는 것을 막으려 하는 것과 같은 명왕조의 이런 풍조는 당대의 세계주의적인 개방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쿠빌라이의 정신적인 계승자인 성조 영락제때 대규모 선단의 파견이나 후반기 서양 선교사들의 입국 등, 또 다른 일면을 보이기는 하였지만 명(明)이라는 왕조이름과는 달리 그 실태는 '암(暗)'흑제국이었다.

명 태조는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중국 내지만을 고수하고 더 이상 발전해 나가지 않음으로써 불필요한 문제발생을 피하려 했다.

그의 유훈(遺訓)에는 영원히 침범하지 말아야 할 나라 열 다섯을 들고 있지만 그 속에 다행스럽게 조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리장성은 어느 때보다 더욱 거대하게 재건되었다.

명제국에는 이전의 대원울루스의 중핵을 형성한 사람들의 절반정도가 잔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몽골지배가 중국사회에 남긴 것이 진정 어떤 것인가는 원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의 최후의 모습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진다. 그의 퇴장모습은 중국 역사상 선례가 없는 것이었다.

사직을 따라 자결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적에 의해서 처형되거나 제 손으로 제위를 넘겨주지도 않았다. 궁문을 빠져나가 자기 조상들이 살던 북방 초원지대로 도주했다. 중국역사에서 원이 가지는 위치를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필자만의 독단일까?

박한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상두유적지 가는 길

대도(大都)와 상두(上都)는 둘 다 원의 수도였지만 지금은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

대도는 베이징(北京)이란 이름으로 중국의 수도이자 아시아의 중심 도시로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원 왕실의 여름궁전이 있던 상두는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있다.

베이징에서 상두로 가는 길은 펑닝(豊寧)과 둬룬(多倫)으로 이어지는 320㎞ 정도. 펑닝까지 160km는 길이 포장돼있어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그 뒤로는 비포장길의 연속이었다. 안내 표지판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철책도 없는 수백㎙ 낭떠러지 언덕 흙 길과 쿵쾅거리는 돌 길을 수도 없이 통과했다.

재중동포 가이드 이동희(李東羲ㆍ35)씨도 "여러 곳을 가보았지만 이렇게 험한 곳은 처음"이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경관은 장관이다.

설악산 북한산 월출산 등을 섞은 뒤 뻥튀기한 옌산(燕山)산맥의 바위 산들이 나타나더니 이후로는 내내 초원이다.

길목에는 소묘지, 청스라, 홍스라, 초웬 같은 10가구 안팎의 작은 마을들이 있다. 마을에는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들이 살고있는데 어떤 곳은 하나의 민족이, 또 어떤 곳은 여러 민족이 섞여 살고있다.

집마다 유리창이 있는데 한 집에 적어도 두 세장은 깨진 상태로 있어서 궁핍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마을마다 집 하나쯤에 TV 시청을 위한 파라볼라 안테나가 설치돼있다는 사실.

길을 가다 보면 이곳이야 말로 유목문명과 정주(定住)문명이 섞인 문명의 점이지대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마을을 이뤄 함께 사는 것은 정주민의 방식이지만 유목민들처럼 말 염소 양 등을 집에서 수㎞ 떨어진 곳에 방목하고 있었다.

그나마 마을이 있는 것은 둬룬까지. 남서쪽 20km를 더 가는 상두길은 초원뿐이었다. 상두에 도착해도 만나는 것은 잡초가 뒤섞인 토성과 건물의 받침돌 몇기 정도가 전부였다.

14세기의 화제이후 궁성이나 황성은 폐허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박한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후원 삼성전자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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