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60부터이니, 나는 이제 겨우 한살이라고들 해요" 후배들이 붙여 준 별명 '흰머리 소년'이 그는 반갑다. 권성덕씨. 지난 7월 14일 만 예순을 넘긴 자칭타칭 만년 소년이다.이번에는 악극단 배우다. 해방 공간에 일본에 건너가 신극 공부를 하고 와 보니, 신세대 연극인들이 득세하고 설 자리를 빼앗겨 버린 애환의 노배우역이다. '어떤 노배우의 마지막 연기.'
그러나 사람들은 역동적이거나 때로는 전위적이기까지 한 무대에서의 그를 더 쉽게 기억해 낸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애환끼 어린 역을 비껴 온 그의 책임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의 첫 무대가 서울시극단의 '봄날'이었다. 광주민주화 항쟁을 조명한 연극에서 그는 시민군의 정신적 지도자 조비오 신부, 계엄군 단장 등 4개 인물을 넘나들었다.
이어 서울연극제 화제의 무대 '바다의 여인'에서는 자아를 찾아 길 떠나는 부인을 쓸쓸히 보내는 노년의 남편역까지, 그는 언제나 길 위의 사내였다.
지난해 무대에서의 그는 이미지를 종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햄릿'에서 간신 폴로니어스 등 3개역, '옴'에서는 원효대사였다. 그러다 성수대교 다리밑 공사장에서 펼쳐졌던 '철안붓다'에서는 광인이었다.
1972년부터 24년 동안 몸 담았던 국립극단 소속 배우로서, 그는 빛나는 조역으로 기억됐다. 1965년 연극 배우로서 신문에 이름 석자가 박혔던 일이 연극 배우로서의 첫 발이었다.
93~95년 국립극단장 역임을 끝으로 공식 경력을 마감했던 그는 자리를 뜨고 나서야, 삶에서 참으로 필요한 것이 인간적 온기임을 체득했다. 그는 진정한 주역이 됐다.
지난 7월의 무언극 '할아버지의 호주머니'는 새 출발점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는 노숙자 할아버지 역은 그에게 새 삶을 선사했다.
동숭아트 센터에서 사흘만 하기로 돼 있었으나, 만원 사례로 연장까지 들어갔던 기억은 아직도 새롭다. 강원도 오지, 서해낙도에서의 공연이 이어졌고, 문화의 혜택을 제대로 누려보지 못 한 이웃들에게 그 스스로 하나의 '선물'이 되었다.
국립극장장을 물러 난 뒤에도 출근한답시고 4개월 동안 목욕탕에서 시간을 때웠던 낙담과 오기의 시간이 남겨준 씁쓸한 기억에서 자신을 건져 주었던 따뜻한 무대 아니던가.
소년의 이번 무대는 조락의 풍경으로 이어진다. 달관의 끝은 체념인가. "어찌 보면 인간이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 썰렁한 마음을 달래며 가는 긴 여정인지도 모릅니다.
"지나쳐 온 삶의 스산한 풍경들을 헤쳐 나와, 흰머리 소년은 마지막 암전을 이렇게 불러낸다. "나를 사랑한 사람들, 나를 외면한 사람들, 그리고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 안녕히 계십시오."
이 말은 결코 극중 인물만의 것이 아니다. 객석은 그를 만나,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무대를 확인하게 된다. 이어 2월 미국, 9월 일본에서 '할아버지의.'를 순회 공연하기 위해 그는 길을 떠난다. 이에 앞서 26일 연극배우협회의 '올해의 배우상'을 단독 수상, 다사로왔던 2000년의 종지부를 찍었다.
장병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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