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 문단은 다난했다. 이른바 새 밀레니엄에 대한 열광이 새로운 문학의 에너지로 전환되기 전에 '순문학'의 문화적, 시장적 공간은 급격하게 약화되어 갔다.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 밑에서 문학은 이미 거품이었고, 구조조정의 대상이었다. 여기에 문학제도를 둘러싼 문제제기들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문학제도를 탈중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멸과 폭로의 수사학 뒤에서 의미있는 논의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논의에서 문학작품은 그 중심에 서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 제기가 문학작품에 대한 이해의 확대로 나아가지 않고, 작품을 둘러싼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논의로만 제한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더욱이 시 장르는 그런 논의에서조차 변방에 밀려나 있었다.
최근의 김언희 시를 둘러싼 논쟁은 이런 맥락에서 상당한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실제 문학작품에 대한 이해와 평가에 관한 논쟁이었다는 점, 그리고 주류 장르가 되지 못하고 있는 시, 특히 여성시의 미학적 이해에 관련된 논의였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러나 성찰적 언어보다는 즉각적인 정서적 반응이 우선하는 온라인 상의 논의들은 결국 '미학'이 아닌 '윤리'의 문제에 매달림으로써, 시 작품이 중심이 되는 논쟁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디를 보아도 시는 없고 시에 대한 흉흉한 풍문만이 떠도는 것이다. 시인 유하의 표현을 빌리면 "이제 시의 운명은 그 변방성(邊方性)의 극점에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가 그 운명을 완성하려면 결국 '미학'에 관한 탐구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단 하나의 길 밖에는 없다.
여성시 그리고 여성적 상상력과 언술은 우리 시의 가장 예민한 미학적 전선을 형성한다. 최근 발간된 계간지의 여성시들은 이런 여성적 미학의 가능성을 재확인시켜준다.
조용미의 '가시연'('문학동네' 2000년 겨울호)의 경우는, 식물성과 동물성을 동시에 함유하는 양성적 존재로서의 '가시연'을 보여준다.
'제 어미의 몸인 커다란 잎의 살을 뚫고 물 속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잎맥으로 흐르는 짐승의 피를 다 받아 마시고 나서야' '비명처럼 피어나'는 가시연의 섬뜩한 이미지가 등장한다.
'흑자줏빛 혓바닥'으로 상징되는 가시연의 '저 끔찍한 식물성'은 '못 가장자리의 방죽'에서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금이 가고 있는 그 소리를/ 저 혼자 듣고' 있다. 가시연의 짐승스러운 식물성은 어떤 불길한 붕괴의 예감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김선우의 '물로 빚어진 사람' ('문학과 사회' 2000년 겨울호)은 보다 의식적으로 여성성을 탐구하는 시로 이해된다. 여기에는 가장 여성적인 몸의 경험인 월경과 출산의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그 안에는 '월경 때가 가까워오면/ 바다 냄새로 달이 가득해지네'라는 비교적 고전적인 상징들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저의 몸에서 퍼올린 즙으로 비를 만든/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의 이야기'는 '깊은 우물 속에서 계수나무', '푸른 등을 반짝이던 사막의 물고기떼' 같은 현란하고 다소 장식적인 이미지들에 의해 그 미학적 구조가 완성된다.
김선우 시인은 같이 수록된 두 편의 시에서도 죽음과 출산이라는 두 가지 여성적인 사건을 겹쳐놓는다. 그 사건들은 이 세계의 탄생에 얽힌 깊고 어두운 비밀들의 징후이다.
/문학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