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가 거리로 내몰릴 지 모른다", "우리가 '버림받은 세대'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하다",40대 가장들이 떨고 있다. 내년 초로 예상되는 제2의 실업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일자리는 줄어드는데 새로운 산업 환경이 요구하는 전문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한 탓에 갈 곳이 없다. "이번에 잘리면 끝"인 셈이다.
대기업 부장으로 일하다 실직한 차모(48)씨는 "아침 저녁으로 일 할 곳을 찾아 다니지만 경비직이나 외판원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다"고 말했다. 최근 K은행에서 퇴사한 김모(45)씨는 "대여섯 군데 헤드 헌터 업체에 이력서를 냈지만 번번히 퇴짜를 맞았다"며 "컴퓨터와 어학에 뛰어난 386 세대도 취업이 어려운 판에 우리 같은 40대가 할 일이 뭐 있겠느냐"며 허탈해 했다.
40대 가장의 불안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실업난은 구조적 실업과 마찰적 실업, 경기 불황이 한꺼번에 겹친 복합 실업의 양태를 띨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실업자의 양적 증가 보다 실업의 질적 측면이 더욱 심각하다는 뜻이다.
때문에 다가올 실업난은 40대 실직자를 서서히 도시 빈민으로 전락시키는 '악성 실업'이 될 가능성이 그 만큼 높다.
22일 통계청이 발표한 고용 동향에 따르면 11월말 현재 실업자수는 79만9,000여명. 이 가운데 22.4%가 40대다. 한국노동연구원 전망에 따르면 내년 2월 실업자는 110만 명, 지금 비율로만 따져도 40대 실직자는 24만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LG경제연구원 송태정(宋太政) 연구원은 "IMF 실업은 불황에 따른 경기적 요인이 컸던 탓에 경기가 호전되면서 빠르게 회복됐다"며 "그러나 최근 실업은 산업 재편으로 인한 구조적 실업의 성격이 강해 장기 실업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헤드헌터 업체인 유니코서치의 김원대(金沅坮) 팀장은 "40대 실직자들은 전문성을 갖추지 못해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가 힘들다"고 했고, 노동부 중앙고용정보관리소 박천수(朴天洙) 박사는 "40대 재취업이란 실제 자영업이 대부분"이라며 "드문 와중에서도 40대를 원하는 직종은 대개 단순 노무직 정도"라고 밝혔다.
한국노동연구원 강순희(姜淳熙) 동향분석실장은 "젊은 층, 고학력자들은 그나마 실업 탈출이 가능하지만, 저학력 중장년 층들은 실업 극복이 더욱 힘들어졌다"며 "불황이 길어지면 이들 40대 실직자들이 도시 빈민화 할 것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최성욱기자 feelchoi@hk.co.kr
이상연기자 kubrick@hk.co.kr
■"갈 데가 어디 있겠어요, 이제 서울역 앞에 가야죠"
크리스마스를 사흘 앞 둔 22일 인천 청천동 대우 자동차 부평공장. 7,000여명의 생산직 근로자들은 곧 닥칠 대량 해고의 찬 바람 앞에서 대책 없이 서 있다. 회사측이 최종적으로 직원 절반 가량인 3,154명의 인원 감축안을 통보한 까닭이다.
올해 들어 회사를 이미 떠난 500여명은 그나마 제 갈 길을 찾은 젊은이거나 정년 퇴직을 눈앞에 둔 50대들. 지금 남아 있는 이들은 40대가 대다수다. 회사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지만 이제는 절망적인 상태가 됐다.
지난 넉달 동안 70여만원의 임금을 받고, 1,000만원의 빚을 졌다는 최인조(44)씨는 "생활비가 없어 아내가 공장에 나갔는데 보름 만에 손가락이 절단됐다. 치료를 받고 있는 아내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애들 생각만 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울먹였다.
조립3과장 박보영(52)씨는 "해직 대상에 오르내리는 사람들 대부분이 40대 단순 조립공들"이라며 "이들은 특별한 기술이 없어 쫓겨 나면 곧바로 길바닥에 나가 앉을 판"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부평공장에서만 12년을 근무했다는 기영석(46)씨는 "일이 없을 때는 공사판에 나갔었는데 그나마 공사판 일거리도 줄어 들어 걱정이다"며 "직원들 사이에서 '서울역 노숙 자리나 로비해 둬야 하는 거 아니냐'는 자조적인 농담이 오간다"고 말했다.
80년대 비지땀을 흘리며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됐지만 이제는 경제 위기의 희생양이 될 처지에 몰린 셈이다.
■갈 곳 없는 40대 실직자
공기업, 금융, 민간 부문 구조 조정과 부실 기업 퇴출 조치, 경기 불황 등으로 인해 내년 초까지 다시 쏟아져 나올 실업자는 어림잡아 30여만명.(한국노동연구원 전망치). 이들 중 20% 가량이 고등학생과 대학생 자녀를 한 두명씩 둔, 40대 가장들이다.
그러나 이들을 불러 주는 곳은 찾아 보기 힘들다. 얼마 전 서울 동작구 사당동 사당고용안정센터에서 열린 구인 구직 만남의 날 행사. 6개 업체가 참가해 14명을 뽑았지만 40대를 뽑는 업체는 한 군데도 없었다. 이 달 초 중소기업종합전시장에서 열린 직업박람회에서도 40개 업체가 참여해 230명을 채용했지만, 40대는 고작 6명 뿐이었다.
■부실한 재취업 교육, 힘겨운 창업
40대 실직자들을 위한 재취업 교육도 허술하다. 직업 훈련 교육의 40%가 정보 통신 관련 분야다. IT 분야의 창업과 직업 훈련을 맡고 있는 경실련 하이텔 정보교육원의 박용수(朴龍洙) 팀장은 "주로 20대와 30대 초반이 교육을 받아 올 상반기 취업률이 90%에 이르지만, 40대 교육생은 한 명도 없다"며 "솔직히 40대에 적합한 직업 훈련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선뜻 자영업을 택하기도 수월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한국생산성본부 최승학(崔承鶴) 위원은 "실직자들이 주로 음식점, 대리점 등의 창업을 많이 하는 편이지만 성공할 확률은 20~30%에 불과하다"며 "음식점들도 대형화 추세기 때문에 소규모 영세 자영업으로는 실패하기 십상이다"고 말했다.
■노숙자 쉼터가 마지막 피난처?
궁지에 몰린 실직자들에게는 노숙자 쉼터가 마지막 피난처가 될 가능성이 높다.최근 들어 노숙자들은 소리없이 늘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노숙자 쉼터인 '자유의 집'의 경우 입소자들이 10월 450명, 11월 780명으로 매달 배 가까이 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일거리가 떨어진 일용직 노동자들인 데 최근 기업체 부도와 구조조정에 따른 실직자들도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노숙자 다시서기 지원센터의 한 관계자는 "실직 후 두세 달 지나 노숙자 쉼터를 찾는 것을 고려하면 내년 2~4월께면 구조 조정에 따른 실직자들이 대거 몰릴 것 같다"고 말했다.
최성욱기자
feelchoi@hkl.co.kr
이상연기자
kubrick@hk.co.kr
■제2 실업한파 IMF때보다 '혹독'
내년 초로 예상되는 제2의 실업난은 IMF때 보다 더 춥다.
IMF 실업자의 경우 명예 퇴직시 퇴직금과 위로금 등 목돈을 챙긴 경우가 많았다.그러나 이번에는 부실 기업의 퇴출과 구조 조정 과정에서 밀려 나오기 때문에 일부 업종을 제외하면 명퇴금은 커녕 퇴직금도 제대로 받기 힘들다.
게다가 IMF 당시에는 연 30%에 육박하는 고금리 덕에 무시할 수 없는 금리 혜택을 누릴 수 있었지만 현재는 금리가 7~8%에 불과하다.
실업자에 대한 정부 지원도 대폭 줄었다. 실업 급여 혜택자가 전체 실업자의 11% 정도에 불과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공공 근로 사업의 경우 99년 2조 5,900여억원에서 내년 6,000여억원으로 대폭 깎였다. 고용보험기금과 근로복지진흥기금 등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실업 대책 예산도 99년 5조 2,947억이었지만 내년에는 3조 1,678억원 가량으로 2조 넘게 줄어 들었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이번 실직자들의 경우 재취업이 사실상 불가능할 뿐 아니라 장기 실업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IMF 실업의 경우 경기적 요인이 강했던 탓에 경기가 호전되면서 실직자들도 빠르게 고용 시장에 흡수됐다. 99년 2월 178만명이나 됐던 실업자가 올해 10월에는 76만명으로 뚝 떨어졌다. 하지만 이번은 성격이 조금 다르다.
실직자들, 특히 40대 이상의 가장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올 상반기 정보통신산업이 41.2% 성장하는 등 2004년까지 50여만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지만 전문성이 없는 40대 실직자들에게는 남의 일이다. 굴뚝 산업에서 몇 십년 경력을 쌓아도 첨단 산업의 신기술을 따라잡을 도리가 없는 까닭이다.
"실직자들이 새로운 직업환경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번 실업이 장기실업 가능성이 큰 구조적 실업"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때문에 이번 실업난이 자칫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현재에도 1년 이상 직업을 갖지 못한 장기 실업자가 전체 실업자중 15.2%를 차지하고 있다. 경기 후퇴 후 6개월 뒤에 장기 실업화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내년 중반기에는 상당한 수준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LG경제연구소의 송태정 연구원은 "실직자들의 재취업이 힘들 뿐 아니라 고용의 질 저하, 소득 불균형 심화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실직자들이 도시빈민화가 우려된다"며 "이에 대한 중장기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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