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와 풍속화-그 닮은 예술세계소리에서 그림을 보고, 그림에서 소리를 듣는다. 이를테면 라벨의 음악에서는 화려한 색채감이, 클레나 칸딘스키의 그림에서는 음악적 리듬감이 묻어난다. 상이한 예술 장르가 시대를 넘어 또는 동시대를 살며 서로 닮기도 한다.
국문학자 김현주(46ㆍ경희대 교수)는 17~18세기 조선에 새로운 예술로 나란히 등장한 판소리와 풍속화에서 닮은 점을 발견한다.
예컨대 판소리 사설에서 눈 앞에 보는 듯 생생하게 펼쳐지는 정경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풍속화와 통한다. 판소리 이전 문장체 고소설이나 풍속화 이전 문인화가 비현실적이고 몽롱한 분위기를 띠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가 쓴 '판소리와 풍속화'는 판소리와 풍속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닮았는지, 왜 닮게 됐는지를 밝힌다. '춘향전'의 판소리 사설을 중심으로 분석하되, 그림으로는 풍속화 뿐 아니라 진경산수화와 민화 등 조선 후기 회화를 폭넓게 다뤘다.
지은이의 말대로, 국문학자가 그림을 건드린 것은 '곁눈질'이요 '외도'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문학과 그림의 가로지르기는 좁은 시야로는 미처 볼 수 없던 것들을 드러내는 즐거운 모험이기도 하다.
무엇이 닮았단 말인가. 인물 생김새나 옷치레, 방 안 치장이나 바깥 풍경, 잔치나 고관 행차 등을 묘사하는 춘향전의 여러 장면에서 그는 회화적 상상력을 읽고, 실제로 그와 닮은 그림을 찾아낸다.
예컨대 이도령이 밤에 춘향 집을 찾아가는 대목은 신윤복의 풍속화 '야원모금(夜禁冒行)'의 정경과 비슷하며, 춘향 방 치장은 민화의 책거리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눈에 금방 띄는 점을 지적하는 데서 더 나아가 판소리와 풍속화의 심층구조를 비교함으로써 더 깊은 유사성을 짚어낸다.
판소리는 전지적 작가의 시점과 여러 등장 인물의 시점을 오락가락 하며 사설을 풀어가고, 실경산수화도 그림 속 인물과 그림 밖 감상자의 시점을 섞어 그린다.
이러한 시점의 혼합 말고도 공식적이고 유형화한 표현의 반복, 대상을 클로즈업한 세밀 묘사, 우스꽝스런 희화화, 자유분방한 성적 표현 등에서 판소리와 풍속화 등 조선후기 회화의 동질성을 확인한다.
그는 이러한 유사성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조선 사회에 일어난 변화에서 찾는다.
경제력이 올라가고 국가의 지배력이 약해지면서 유교에 바탕을 둔 사대부 중심의 관념적 세계관이 흔들리고, 그로 인해 문예관 또한 사실주의 미학으로 기울었으며, 중인층이 부상하고 예술에 대한 수요가 서민층까지 확대된 것 등이 그것이다.
낮은 신분이었던 광대와 환쟁이가 사회적 울분을 공유했던 점도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판소리와 풍속화를 서로 닮게 만든 요인으로 지적한다.
문학적 텍스트에서 그림으로 나아가는 지은이의 시선은 참신하고 흥미롭다. 그러나 국문학자의 접근인 만큼 한계도 분명하다. 판소리는 문학이기 전에 음악인데, 성음이나 음률, 장단 등 판소리의 음악적 특성을 그림과 비교하는 것이 빠졌다.
또 판소리가 어떻게 그림을 닮았는지는 찬찬히 밝혔지만, 풍속화가 판소리를 어떻게 잡아당겼나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다. 소리(판소리)와 빛(회화)의 관계를 쌍방향에서 교차 점검하는 좀 더 본격적인 연구가 과제로 남은 셈이다.
김현주 지음,효형출판 발행
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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