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인터넷 등 통신 인프라가 잘 구축돼 있고 교육 수준도 높아 지식기반 산업을 발전시킬 충분한 여건을 갖추고 있다. 한국의 가능성을 확신한다." (마이클 카펠라스 컴팩 회장)실리콘 밸리를 중심으로 한 미국 하이테크 업계에서 한국은 대체로 첨단 기술력과 창의성이 취약하고 시장 전문가가 부족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 인구의 급속한 저변확대 등 인터넷과 무선통신 경제체제로 진입하는 속도가 세계 수준급이고, 이를 숙련된 인력이 뒷받침하고 있는 것 자체를 강력한 잠재력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국의 PC방, 휴대전화, 초고속통신 열풍 등은 시사주간 타임지나 실리콘 밸리의 레드 헤어링과 새너제이 머큐리, LA타임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등 유수 언론이 한국 인터넷 경제의 성장 동력을 거론할 때마다 인용하는 단골 사례다.
스탠퍼드 대학의 투자 기관인 스탠퍼드 매니지먼트 컴퍼니의 댄 킹스턴(39) 이사는 "한국은 금융시장이나 투자환경보다는 성실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기술 인력에 강점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같은 해외의 시각은 최근 외국 기업들이 국내 벤처 업계에 투자를 강화하는 것과 무관치 않다. 한국 벤처의 잠재력을 인정한데다 한국에서 벤처투자 열기가 급속히 냉각됨에 따라 우수한 기술을 헐값에 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퀄컴은 이달 초 676억원의 벤처투자 펀드를 설립, 한국의 벤처를 육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마이크로소프트, 휴렛팩커드, 인텔은 지난달 2,000만달러 투자와 장비ㆍ소프트웨어 지원 계획을 담은 'KIVI' 프로그램을 발표했으며, 컴팩도 10월 1억달러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미 성사된 해외자본 투자도 적지 않다. 올 1~9월 정보통신(IT) 업계 외자유치액은 총 22억8,700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2배 늘었으며, 벤처 거품의 주범으로 몰린 인터넷 벤처는 같은 기간 지난해의 4배가 넘는 1억4,600만달러의 외자를 유치했다.
돈뿐이 아니다. 시스코 시스템즈는 최근 내년 국내에 주문형반도체(ASIC) 연구개발센터를 개설하고, 3년간 1,180만달러의 연구비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루슨트 테크놀로지도 내년 2월 벨연구소 한국지소를 세우고, 벤처 기업과의 제휴를 강화하기로 했다.
세계적 IT 기업들이 우리나라를 물건만 파는 시장이 아니라 '사업의 파트너'로 새롭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V2V 벤처스의 수석파트너 그레고리 힐(35)은 "현재 확보한 기술을 어떻게 응용해 상품화하느냐가 한국 벤처의 최대 과제"라며 "특히 풍부한 기술인력이 '보석'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리콘 밸리=김병찬 특파원
bckim@hk.co.kr
■S밸리 한인벤처가 본 '한국의 기술 경쟁력'
한국 벤처 기업들은 실리콘 밸리 기업들과 비교해서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실리콘 밸리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기업인들은 "도전해볼 만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무선 통신 장비 개발 업체인 해프돔시스템스(Halfdomsystems)의 구철회(具喆會ㆍ45) 사장은 "누구에게나 인터넷과 무선통신사업 분야는 미개척지"라며 "출발선상의 불이익이 크지 않기 때문에 방향 설정과 시장 전문가 확보라는 과제만 해결하면 한국 벤처기업들도 세계 시장에서 승산이 있다"고 주장했다.
해프돔시스템스도 아직은 시장 규격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게이트웨이'라는 장비 개발에 가장 먼저 뛰어든 업체 중 하나로 실리콘 밸리에서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근거리 무선 통신 기술인 불루투스 칩 분야에서 세계 최선두군에 속해 있는 GCT(Global Communication Technology)의 박세준(朴世俊ㆍ46) 부사장은 속도는 느리지만 한국 벤처업계 주변에서 전문가 집단의 저변이 확대되는 흐름을 강조했다.
박 부사장은 "투자회사에 테크놀로지 지식과 경험을 갖춘 전문가들이 서서히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며 "정확한 안목을 갖춘 투자 전문가 그룹이 폭넓게 형성돼 엄격한 자금운영체제가 구축되면 엉뚱한 금융 사기 사건이나 거품, 벤처 기업인들의 도덕적 해이 현상이 줄어 들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투자회사들의 경우 공학과 투자ㆍ금융 분야에서 연차적으로 10년 이상 경력을 쌓은 전문가들이 송곳 질의를 벌이며 심사를 하기 때문에 투자자들의 귀중한 자금이 낭비될 여지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박 부사장은 "한국은 공과대학 졸업생들을 비롯해 기술 인력이 풍부하기 때문에 엔지니어링 분야와 투자 금융 분야의 인적 교류가 지속될 수 있는 여건은 갖춰져 있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GCT의 블루투스도 개발 파트는 한국 법인에서 진행하고 있다.
창업 1년여 만에 최근 자신의 무선 통신 하이테크 기업인 엑시오 커뮤니케이션을 시스코시스템즈에 1,860억원에 매각한 주기현(朱基賢ㆍ44) 사장은 인터넷 거품을 한국 벤처산업이 거쳐야 할 통과의식의 성격으로 파악했다.
주 사장은 "회사 사업내용이 알려지자 한국에서도 유사 사업을 추진하는 업체들이 생겨 났다"며 "그런 따라하기식 거품 현상이 본질적으로 낭비 요소를 안고 있지만 비즈니스 모델과 기술 선점 효과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초창기의 혼란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밝혔다.
그는 또 "인터넷 사업에 뛰어든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앞으로는 엔지니어링 분야의 인력들이 마케팅 분야에서 활동하는 구조가 정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리콘 밸리에서 7년 연속 흑자를 기록한 응용소프트웨어 회사인 e-MDT(Micro Devices Technology)의 정 정(鄭 淨ㆍ46) 사장도 사회 정서적인 측면에서 한국 벤처 산업의 장래를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정 사장은 "어려울 때는 중소규모 단위로 뭉치는 힘이 강한 것이 한국인의 기질"이라며 "그런 기질은 기본적으로 중소 집단인 벤처기업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도약하는데 적합한 조건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리콘 밸리=김병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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