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20일. 한국펜싱의 새날이 열린 날이었다. 무대는 시드니올림픽. 남자 플뢰레 개인전에 출전한 김영호(29ㆍ대전도시개발공사)는 세계랭킹 1위 랄프 비스도르프(독일)와 결승에서 맞섰다. 동점 7번과 역전 4번을 주고받으며 14_14의 평행선을 달렸다.관중들은 단 한 점으로 결판날 명승부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마침내 김영호가 주특기인 쿠페(상대 어깨부위를 위에서 내려찌르는 공격)로 '용의 눈'을 그려넣었다.
국내는 물론 아시아 남자선수를 통틀어 첫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김영호의 금빛 찬란한 메달은 척박한 국내 현실을 봤을 때 기적이었고 올해 체육계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가장 장엄한 광경은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했던가. 김영호의 금메달 드라마에는 '역경'이라는 배경이 있어 더욱 극적이었다. 부상과 실의, 열악한 한국 펜싱의 현실과 홀어머니에 대한 효심..
99년 초 기흉(가슴에 공기가 들어가 폐가 오므라드는 상태)으로 수술대에 올라 한동안 칼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곧 오뚝이처럼 재기했다. 국내 플뢰레 선수는 20여명뿐.
대표선수들은 연습상대를 구해 전국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럴수록 김영호의 오기는 더욱 예리해졌다. 85년 아버지의 타계로 홀몸이 된 어머니는 포근한 마음의 고향인 동시에 자극제였다.
김영호는 꼬마시절부터 농번기때면 엄마고생을 덜어준다고 친구들까지 동원했던 효자였다. 부인 김영아(29)씨도 펜싱 국가대표 출신이라는 사실은 스타탄생의 맛깔진 '양념' 이었다.
그에게는 꿈이 있다. 바로 '펜싱 띄우기'. 대외행사 초대에 꼬박꼬박 응하는 것도 펜싱열기를 이어가겠다는 욕심에서 였다. 김영호는 다음 아테네올림픽에서 2연패(連覇)를 이뤄내 펜싱이 '반짝 종목'이 아님을 확인시키고 싶다고 했다.
내년 1월 중순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슈퍼마스터스대회를 시작으로 그의 목표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이어질 것 같다.
김정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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