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교체의 열풍이 뜨겁게 휘몰아쳤던 2000년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이맘 때면 프로 기사 개개인 못지 않게 '프로기사의 산실'인 바둑 도장들도 연말 결산으로 분주하다.올해 '자식 농사'는 어느 도장이 더 잘 지었을까. 출신 기사들의 성적표 하나 하나는 문파의 명예와 자존심에 직결되므로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1990년대 이후 신예기사 양성의 양대 문파로서 성가를 드높여 온 서울 강남의 명문 '권갑룡 도장'과 강북의 명문 '허장회 도장'의 올해 성적은?
'지옥문'으로 통하는 프로입단대회 성적과 출신 기사들의 활약상으로 볼 때 올해는 아무래도 권갑룡 도장의 손을 들어줘야 할 것 같다.
권갑룡 6단 자신의 친딸인 효진(2단)양을 비롯해 윤영선, 김민희, 홍꽃노을 2단, 남치형 초단 등 대표적인 여류 강자들을 배출해 주로 '여류 명문'으로 이미지를 굳혀 온 권갑룡 도장은 올해 남녀 불문하고 사상 최대의 '풍작'을 거두었다.
먼저 1년에 8명(지방 입단대회 제외)의 수졸(守拙ㆍ초단의 별칭)을 뽑는 프로입단대회에서는 대만 출신의 천스옌(陳時淵)군을 비롯해 박승현, 최민식군 등 문하생 3명을 당당히 합격시켰다.
이에 따라 권갑룡 사단이 배출한 프로기사 수는 국내 바둑도장 가운데 최대 규모인 25명으로 늘어났다.
도장의 성가를 더욱 높인 것은 입단 4~5년 차 선배들의 이변에 가까운 활약이었다.
올들어 32연승에다 정상 '4인방'의 철옹성을 뚫고 생애 첫 타이틀(천원)까지 거머쥔 '불패소년' 이세돌 3단, 처녀 출전한 국제대회(제2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일본 랭킹 3위 혼인보(本因坊) 보유자 왕밍완(王銘琬) 9단 등 3명을 연파하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최철한 3단, 제5기 박카스배 천원전과 제34기 왕위전 본선에 연속 진출한 원성진 2단이 모두 권갑룡 도장 출신이다.
입단 이후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이들은 올들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다승 및 승률랭킹 상위권에 진입하며 출신 도장의 주가를 올리는 데 톡톡히 한몫을 했다.
'충암사단'의 대부 허장회 8단이 운영하고 있는 도장에서는 올해 주형욱ㆍ박정상 초단 등 2명이 입단대회 관문을 통과했다.
현재 55명의 문하생 가운데 무려 30명이 한국기원 연구생(총정원 100명)으로 활약할 정도로 층이 두텁고 실력이 짱짱하기로 소문난 허장회 도장은 이로써 모두 15명의 현역 프로기사를 거느리게 됐다.
출신 기사들의 성적 면에서는 줄곧 권갑룡 도장을 앞선 게 사실이지만 올핸 맏형 격인 김영삼 5단이나 '신4인방' 김명완 4단이 다소 주춤하면서 밀리고 있는 느낌. LG배 세계기왕전 8강에 오른 강지성 4단이나 신인왕전에서 준우승한 한종진 3단 정도가 비교적 좋은 성적을 낸 예다.
하지만 갓 입단한 문하생 박정상 초단이 제35기 왕위전에서 '반상의 철녀'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을 꺾으며 저단진에겐 '바늘구멍'이나 다름없는 본선리그에 진출, 내년도엔 적지않은 파란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경기 분당신도시의 김원 도장은 올해 이재웅, 윤재웅군과 이다혜양 등 3명을 입단시키며 '신흥 명문'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올해 흥창배 결승전에서 루이 9단과 아슬아슬한 접전 끝에 아깝게 준우승을 차지한 '여자 이창호'조혜연 2단이 이 도장 출신. 게다가 현재 김원 6단의 지도로 바둑수업중인 문하생 40명 가운데 20명이 한국기원 연구생일 정도로 전반적 실력도 탄탄해 다크호스로 주목받고 있다.
일본의 기타니(木谷), 세고에(瀨越)에 버금가는 한국 최고의 명문도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앞으로도 계속 뜨거워질 전망이다.
변형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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