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임철순 칼럼] "이젠 갈 시간이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임철순 칼럼] "이젠 갈 시간이다"

입력
2000.12.19 00:00
0 0

'가다'라는 말은 참 재미있다. 이 말에는 생성과 발생, 이동과 지향, 영향과 성취, 손상과 변화, 퇴장과 소멸의 의미가 다 들어 있다. 겨우 두 글자에 이처럼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도 드물 것이다.2000년이 저물어 간다. 남은 날이라야 열흘 남짓 밖에 되지 않는다. 가는 2000년을 되돌아 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지향했으며 무엇을 이루었는지 생각하면 허무한 생각마저 든다.

새 밀레니엄 첫 해를 맞았다는 흥분과 감격은 어디로 갔나. 은성(殷盛)하고 화려했던 축제의 기억은 어디론가 아득히 가버리고, 목 잃고 추위에 떨면서 갈 곳 없이 헤매는 사람들이 다시 늘어가고 있다. 고난은 왜 꼭 겨울에 겹치는지, 아무 일 없어도 따뜻한 것이 아쉬운 계절에 고난은 추위와 함께 닥쳐 온다.

스산한 세밑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뒷모습을 유심히 살펴 보게 된다. 어깨의 표정은 얼굴보다 더 정직하다. 사람은 누구나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혼자만의 얼굴이 있지만, 뒤에서 보는 어깨는 속일 수 없다. 이 겨울에는 어깨가 축 처진채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다시 많아졌다.

그들이 직장과 사회에서 물러가고 퇴출당할 때 정작 물러나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일수록 한사코 물러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물러나는 것은 곧 생의 전부를 잃는 박탈과 비참으로만 생각될 것이다.

엊그제 2선후퇴를 천명한 민주당 권노갑 최고위원은 사퇴성명에서 순명(順命)이라는 말을 썼다. 나라와 당과 대통령을 위해 희생하고 양보하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며, 앞으로 이같은 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누구로부터의 명령에 대한 순명이냐에 따라서 앞으로 그의 삶의 모습이 결정되겠지만, 흔쾌하게 찬사를 보내기에는 착잡한 상황이다.

공인일수록 퇴장의 시기를 잘 알아야 한다. 또 물러나는 것은 자신의 독자적인 선택이거나 상황과 시대에 대한 진정한 승복이라야 의미있다.

지리한 법정공방 끝에 미국대선에서 패배한 고어 부통령은 승복연설을 하면서 "아내와 가족에 대한 사랑, 하느님에 대한 사랑, 국가에 대한 사랑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선거전을 끝낸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제 갈 시간이다"라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우리 정치인같으면 '나는 정신적 대통령'론을 펼쳤을 수도 있고 당선무효투쟁을 계속했을지 모른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1987년 대선에서 패한 다음 날 정권타도투쟁을 선언했었다.

그러더니 불과 3년만에 여야합당을 해버렸다. 또 당내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씨는 끝내 승복하지 않고 뛰쳐 나가 대선에 출마하더니 지금은 여당에서 다음 대통령자리를 노리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처럼 패배를 승복하고 물러가는 전통이 아직도 확립되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입시부정으로 구속됐던 음악교수도 몇 년만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박수를 받으며 왕성하게 하던 일을 계속한다. 비리와 몰염치로 잃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는 다시 비리와 몰염치로 복원하면 그만이다.

물러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말에 주목하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마지막 문장에서 새로운 다짐을 한다. 지금까지 전혀 하지 않았던 일도 새로 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으면 결구(結句)가 허전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말에 허구가 없고, 삶의 말년에 가식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할 시점이다. '이젠 갈 시간이다'라는 생각으로 역사와 시대에 승복하면서 2000년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고 싶다.

편집국 국차장

yc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