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정현준 스캔들'로 떠들썩하던 지난달 분당 벤처밸리에 위치한 디지털 위성방송 셋톱박스 개발업체 휴맥스에서는 직원들의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연간수출 1억달러를 돌파하는 대기록을 세운 직원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서로를 축하하기에 바빴다. 불과 180명의 직원이 일궈낸 결실이어서 더욱 값진 것이었다.벤처 하면 흔히 '벼락스타'를 떠올리지만 꾸준한 기술개발로 성공을 일궈가는 '참 벤처'들이 적지 않다.
극심한 돈가뭄에 사이비 벤처의 잇단 비리 사건까지 겹쳐 빈사 상태에 빠져있던 벤처업계에 '위기를 재도약의 기회로 삼자'는 새로운 다짐이 확산되고 있다. '벤처망국론'으로까지 치닫던 여론의 분위기도 '옥석을 가려 참 벤처를 살리자'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윤창번(尹敞繁)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은 "부존 자원과 자본이 빈약한 우리 경제의 체질 강화를 위해 지식집약산업인 벤처 육성은 필수"라면서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일부 부작용도 있었지만 벤처붐이 가져온 많은 긍정적인 효과를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벤처산업이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지난해 벤처기업의 매출증가율은 36.8%로, 대기업 6.6%의 5.8배에 달했다.
올 1~9월 벤처업계 수출실적도 지난해보다 38.2% 늘어난 31억700만달러로, 총수출 증가율(25.9%)보다 높았다. 최근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이 발표한 경제활동인구당 신생기업 종사율에서도 우리나라가 세계 1위에 올라 벤처붐이 고용창출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에 편중된 인재의 재분배, 학벌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채용 정착 등도 벤처붐이 가져온 긍정적인 변화다.
경제전문가들은 현재의 벤처 위기는 생태계의 자정 기능처럼 한 단계 도약을 위해 썩은 살을 도려내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정화(韓正和) 한양대교수는 "현재의 위기는 벤처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 벤처에 대한 사회 전반의 학습부족과 금융시장의 구조적 취약성이 빚어낸 합작품"이라면서 "일련의 조정기를 거치고 나면 벤처 생태계의 체질이 한층 단단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 마이크로소프트 휴렛팩커드 인텔과 함께 2,000만달러의 벤처투자펀드를 조성한 윤영각(尹榮恪) 삼정컨설팅 사장은 "벤처는 고용창출, 산업구조 고도화 등을 꾀할 수 있는 활력소이자 재벌 중심의 경제발전이 낳은 폐해를 혁신할 수 있는 대안"이라며 "특히 우리나라는 높은 교육수준, 우수한 통신인프라 등 벤처 육성의 최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세계도 뛴다
정보기술(IT) 혁명이 세계 경제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세계 각국이 IT분야를 주축으로 한 벤처산업 육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 벤처 산업이 활성화하면 첨단기술 개발은 물론, 연관 산업 발전과 고용창출, 산업 구조조정, 고성장 등을 동시에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벤처의 경제적 파급 효과는 1990년 이후 줄곧 고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미국의 예에서 잘 드러난다. 미국 벤처 기업의 연 평균 성장률은 35%로, 상위 500대 기업의 16배를 웃돈다. 1달러 투자당 수출액과 1인당 매출액도 500대 기업의 각각 4배, 3배를 넘는다.
미국에서도 최근 '닷컴 위기론'이 대두되면서 대량 해고와 폐업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3ㆍ4분기 벤처 투자액이 전 분기보다 16% 늘어난 279억 달러를 기록, 투자 열기가 식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올 1~9월 총 투자액은 701억 달러로, 지난해 동기보다 18.4%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이인찬(李仁燦) 박사는 "미 벤처캐피탈 업계가 위기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이미 70, 80년대 두차례 극심한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시장 대응력을 체득했기 때문"이라면 "70년대에는 무려 300여 개 창투사가 문을 닫는 시련을 겪었다"고 말했다.
일본은 최근 5년내 세계 최강의 'IT 대국'이 되겠다는 전략을 발표하고, 한 축으로 벤처 육성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달 초에는 벤처의 미국 진출 지원을 위해 실리콘밸리에 인큐베이터 센터를 설립했다. 특히 우리나라 해외지원센터와는 달리 소장을 비롯, 직원 大부분을 미국인 마케팅 전문가로 뽑는 등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펴고 있다.
세계 IT시장에서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중국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특히 IT업계 대표 기업은 대부분 베이징(北京)대 칭화(淸華)대 푸단(復旦)대 등 유명 대학이 설립한 기업들로, 대학기업의 지난해 총 매출액은 무려 380억 위안(4조9,400억원)에 달했다.
최근에는 해외 유학생의 귀국 창업을 장려하면서 베이징시의 경우 첨단 과학단지 육성자금으로 매년 15억 위안을 지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는 데 이중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중관춘(中關村)에 배정된 5억 위안은 대부분 해외 유학파 창업 지원에 쓰여질 예정이다.
중국전문 무역업체 ㈜미래성의 김인성(金仁星) 기획팀장은 "중국은 통신시장 전면개방에 대비,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인터넷 등 통신서비스 분야 외국인 투자 제한 정책에도 융통성을 보이고 있다"며 "IT공룡으로 성장하기 위한 힘찬 움직임이 피부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영어가 통하는 고급 IT 인력과 저임금을 무기로 소프트웨어(SW) 최강국에 오른 인도에서도 벤처 창업 붐이 한창이다. 해외 기업들이 인도 인력 직접 고용에서 벗어나 인도 기업에 SW 개발을 맡기는 아웃소싱을 늘린 것이 계기가 됐다. 특히 대학 졸업후 실리콘밸리로 건너가 경험과 두터운 인맥을 쌓은 해외파 기술인력의 귀국 창업이 줄을 잇고 있다.
벤처투자 붐은 유럽도 마찬가지여서 스위스에서는 올해 8억2,000만 달러가 벤처기업에 투자됐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관계자는 "최근 전세계적으로 닷컴 위기론이 확산되고 있지만 경쟁력 없는 기업이 도태되고 견실한 기업만 남게 되면 투자 환경이 오히려 나아질 것이라는 낙관론이 우세하다"고 전했다.
이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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