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유학간 외동딸이 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해야 하는데, 여비를 마련하려고 그만.. 우리 딸은 이제 어떡합니까."8일 오전 서울 중부경찰서 형사계. 전날 낮 은행 출납창구에 들어가 현금 6,000만원을 훔치려다 붙잡힌 박모(49)씨는 조사를 받으면서도 미국에 유학중인 외동딸(19) 걱정 뿐이었다.
불과 2개월전만 해도 서울 강남에서 직원 100여명을 거느린 청소용역업체 대표로, 부인(40)과 딸 등 세가족의 어엿한 가장이었다. 박씨 가정에 불행의 먹구름이 몰려든 것은 10월 중순께. 경기불황으로 돌아온 어음을 막지 못해 사업이 부도나면서 살던 집 등 전 재산을 날리고 말다툼 끝에 아내와 별거에 들어갔다.
"차가운 월셋방을 전전하며 일자리를 얻기 위해 가는 곳마다 냉대받는 것은 견딜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있는 딸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무엇이든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씨가 며칠 밤을 새워 생각해 낸 방법이 은행털이. 양심과 부정(父情) 사이에서 고민한 끝에 의지할 데없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어린 딸만을 생각하며 정신없이 현금다발을 쇼핑백에 담다 경비원에게 들키고 말았다.
박씨는 "양심에 걸렸지만 전화통을 붙잡고 '아빠 곁에 돌아오고 싶다'고 우는 딸 때문에 잠시 눈이 멀었다"면서 "딸만 돌아오면 어떻게 해서든 세가족이 다시 모여 성실히 살아보려 했다"고 한탄의 눈물을 떨구었다.
"사업이 잘 될때는 둘도 없는 친구인 척하다 망하고 나니 비행기표 한장 값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하는 사람들이 원망스럽습니다." 불과 2개월만에 중소기업 대표에서 수갑을 찬 '죄인'으로 전락한 박씨의 얼굴엔 냉혹한 현실이 남긴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