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전, 당선 확정, 당선 유보, 재검표, 꼬리를 무는 소송 제기. 미국의 43대 대통령선거 개표가 사상 초유의 혼돈에 빠진 요 몇주 동안 미국도, 세계도 놀랐다.20세기 내내 세계를 이끌었던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뒷받침한 정치 제도는 이제 한계를 드러낸 것일까. 미국 전문가의 대담을 통해 이 혼란의 의미와 차기 대통령 취임 후 미국의 장래 등을 조망했다.
임성호(林成浩)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MIT에서 미국정치와 의회정치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보스턴 시먼스컬리지 정치외교학과 조교수를 지내다 96년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미국정치연구회장, 한국국제정치학회 연구위원겸 편집위원, 한국아메리카학회 연구이사를 역임했다.
손병권(孫秉權)
1963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거쳐 97년 미국 미시간대에서 미하원 소위원회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땄다.
아주대 사회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을 역임하고 올해부터 중앙대 공공정책학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관계학을 강의하고 있다. 한국국제정치학회 비교정치 및 지역연구(미국)분과위원으로 활동중이다.
-미 대선의 난맥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일부에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붕괴라는 시각도 있는데요.
▦임성호= 미국 민주주의 체제가 이번 대선 때문에 위기에 빠졌다든가 붕괴할 것이라는 진단은 과장이라고 봅니다. 만일 이런 일이 권위주의적인 나라에서 생겼다면 당장 군인들이 개입하는 등 극심한 혼란이 생겼을 겁니다.
이번 사태에 대한 우려와 걱정은 언론이나 대학교수들 같은 소수의 정치적 현자(political pundit)들의 몫일 뿐이고 일반 유권자들은 차분해요. 여론조사를 보니 '빨리 선거결과를 가리기 보다는 공정하게 가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쪽이 압도적이더군요.
적어도 내부적으로는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회의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이번 사태가 200 년 넘게 지속해온 정치체제에 대해 자만심을 갖고 있던 미국인들이 이를 되돌아보는 계기는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피를 흘려 민주주의를 쟁취한 유럽에 비해 거저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 미국은 세월이 흐르면서 다소 안이해진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니까요.
▦손병권= 물론 이 문제를 구조적 문제로 보고 정치제도를 근본적으로 뜯어 고쳐야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위 소수파 대통령이 가능한 간선제도가 그 대상이지요. 그러나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1876년에는 민주당의 틸돈과 공화당의 헤이스가 소수득표자인 헤이스의 승리로 시비가 붙었다가 양당의 합의를 통해 당선자를 확정한 경우도 있고 1960년 케네디와 닉슨이 치열하게 맞붙었을 때도 결과를 놓고 약간의 분란이 있었지만 원만히 해결됐습니다.
사실 미국의 선거인단제도는 원천적으로 큰 주보다 작은 주들에게 다소 유리하게 돼있어요. 가령 인구가 많은 뉴욕주와 적은 사우스다코타주의 경우 선거인단 한 사람이 대표하는 유권자 수를 보면 뉴욕주가 사우스다코타주의 2배나 됩니다. 표의 등가성이 보장되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부시가 공교롭게도 이런 작은 주들을 거의 석권하고, 플로리다 재검표 파동이 일면서 소수파 대통령의 가능성에 대한 시비가 한꺼번에 표출되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제도는 200년 동안 잘 굴러왔고, 앞으로도 유지될 수 밖에 없다는 게 대다수 미국민들의 시각입니다.
▦임성호=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정치제도의 불완전성이 아니라 개표결과 드러난 미국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예요.
이번 선거에선 미국이 완전히 갈렸습니다. 중부와 남부는 부시로, 서부와 동부는 고어로 기울었고, 백인 중산층 중장년 남성들은 부시를, 흑인의 90%와 여성 및 젊은이, 고령층은 고어를 찍었어요.
공화 , 민주 양당 지지자들이 상대후보에 투표하는 비율도 과거에 비하면 현저히 줄었죠. 당파끼리도 똘똘 뭉쳤다는 얘기죠. 오히려 미국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손병권= 그 뿐 아니라 선거를 통해 여러가지 통념이 깨졌습니다. 유권자들이 경제상황이나 정책이라는 객관적 정보보다 입후보자들에 대한 주관적 인식, 즉 후보에 대한 호감도를 따라 표를 던지는 경향이 늘었다는 점이지요.
정책이나 경제상황에 좌우된다면 고어가 압승을 해야하지만 옆집 아저씨 같은 부시에 비해 고어는 잘난 척하는 것 같다는 한계를 못 넘었어요.
앞으로 미국의 대통령은 이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선례에 따라 우선순위를 매겨 특정 분야를 집중 공략하면 됐지만 이제는 유권자들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봐야 하게 됐으니까요.
-그렇다면 현행 선거인단제도를 바꿀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까.
▦손병권= 그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미합중국의 대통령이지 아메리카의 대통령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즉 직선제로 대통령이 선출된다면 미국의 대통령은 다수 국민의 대표자는 되지만 연방이라는 틀 안에서 각주의 동등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합의아래 선출된 대통령은 아닌 것이지요. 그럴 경우 대통령의 권한이 지나치게 증대돼 과연 삼권분립이 유지될 수 있겠느냐는 문제도 제기됩니다.
미국헌법 제정자들도 그 점을 우려했던 것이지요. 직선제로의 개헌은 미합중국의 초석을 바꾸는 거에요.
미국헌법을 받치고 있는 두개의 축인 인민주권(popular sovereignty)과 주주권(state sovereignty)의 균형이 깨지는 것이고 이에 입각해 상ㆍ하원으로 구성된 의회에서 상원의 폐지라는 엄청난 변화가 수반돼야 하는 일입니다.
▦임성호= 각 주정부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선거인단제도는 연방 정부에 대해 주정부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거든요.
게다가 미국인들은 아직도 연방정부보다 주정부를 훨씬 가깝게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연방정부를 중시하던 고어는 플로리다 주법원에 소송을 걸었고, 작은 연방정부와 강화된 주정부를 외치던 부시는 연방법원에 소송을 낸 거에요. 당파적 이익이 작용한 것이지요.
-선거제도상 문제를 논외로 치더라도 재검표 과정이나 사회 분화현상 등을 보면 미국이 더 이상 민주주의의 리더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임성호= 재검표과정을 보면 그런 점도 있지요. 어떤 검표원은 바쁘다고 투표함을 집에 갖고 가서 개표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인들이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민주주의에 익숙하고 자긍심을 가지면서 긴장이 풀린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때문에 논란이 된 투표용지의 통일이나 개표의 정확성 제고 등 선거관리의 측면에서 보완이 불가피할 겁니다. 이 사태가 법정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냉소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사법부 판사들이 과연 국민을 대변하는가, 너희들은 정치 문제를 정치로 풀지 못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미국인들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최후의 보루인 법적 절차를 지켜간다는 자긍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손병권= 미국인들과 외국인들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다른 잣대로 재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사실 미국은 이보다 더한 위기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는 독과점 때문에 농민계층의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고, 60년대에는 주방위군이 남부의 켄트대에 들어가 반전학생들에게 발포까지 한 일도 있었습니다.
미국헌법의 정신이 도전받는 시대는 자주 있었지만 지금까지 왔습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런 사태 역시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의 괴리를 조정해가는 국면으로 바라보는 것 같아요.
걱정하는 사람들은 외국인들이지 아마 미국인들은 미국 민주주의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만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냥 스타일 좀 구겼다고 생각하겠지요.
-대통령 당선자 확정후에도 혼란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은데요.
▦손병권=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국민의 위임이 부족해 국정수행이 어려울 겁니다.
조기 권력누수도 우려되고요. 1980년 공화당 레이건은 압도적인 승리로 국민의 절대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의회를 설득하고 일련의 보수적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대통령이 당분간 갈라진 국론봉합을 위해 상대방을 포용할 수 있도록 선거공약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임성호= 정치지도자들은 이제 유권자들을 어떻게 미국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느냐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 양분됐다고 말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미국인들은 이제 사안별로 나눠졌다고 할 수 있어요. 정치제도는 큰 변화가 없겠지만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를 묶는 끈을 찾는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과 시행착오가 예상됩니다.
-그것이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 추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을까요.
▦임성호= 미국이 이미지에 상처를 입긴 했지만 대외관계라는 것이 사람들의 인식이나 인상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모르죠. 이런 일이 오랜 기간동안 몇 번 반복해 벌어진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손병권= 클린턴이 르윈스키와 스캔들이 있었지만 미국의 대외협상력이 떨어지지는 않았잖아요.
유성식기자
ssyoo@hk.co.kr
이왕구기자
fab4@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