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2년 11월24일 네덜란드의 철학자 바루흐 데 스피노자가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1677년 몰(歿).스피노자는 포르투갈계 유대인 상인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이 게토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었다.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는 계급적 편견으로 그득 차 있어서 인종적 편견이 들어설 자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다수는 칼뱅주의자들이었지만, 유대교도도 가톨릭교도도 그 도시에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데카르트주의자들만이 예외였다.
17세기 사람들에게 데카르트라는 이름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다윈이라는 이름만큼이나, 또는 20세기 전반 빈에서의 프로이트라는 이름만큼이나 추잡하고 끔찍한 것이었다.
스피노자의 불행 또는 행복은 그가 그 시대의 금기어였던 데카르트에 매혹됐다는 데서 시작됐다. 유대 교단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던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에 감염된 탓에, 그리고 회개를 거부한 탓에 스물네 살에 유대 교회에서 파문됐다. 유대교 광신자들은 그를 암살하려고까지 했다.
73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스피노자를 철학 정교수로 초청했지만, 그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여가에 렌즈를 갈아서 생활비를 조달하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했다. 지적 자유라는 개념이 정치적 무정부주의와 거의 동의어로 취급되던 도그마의 시대에 그는 독립적 지식인의 삶을 살았다. 그 독립의 대가(代價)는 고립이었다.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는 스피노자를 '신에 취한 사람'이라고 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범신론자는 죽은 뒤에까지 유물론자ㆍ무신론자로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에게든 비유대인에게든, 인격적 신이 아닌 '자연으로서의 신'은 너무 낯설었으므로.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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