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번화가 샹젤리제에 비르진이라는 서점이 있다. 한국의 여느 대형 서점과 비슷하게 이곳도 책은 물론 팝음반, 비디오 등을 함께 팔며 젊은이들을 불러들이는 대형 복합매장이다.프랑스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은 이 서점의 베스트셀러 매장을 둘러보면 알 수 있다.
거기서 제일 눈에 띄는 얼굴이 소설가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40)의 모습이다. 국내에도 알려진 벨기에 출신의 여작가 아멜리 노통의 신간과 함께, 올해 출간된 슈미트의 화제작 '빌라도 복음서'가 엄청나게 쌓여있고, 그의 사인회를 알리는 광고들이 곳곳에 붙어있다.
슈미트는 국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랑스 문단의 총아로 떠오르고 있는 작가다. 60년 리용 출생. 명문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87년 박사학위를 땄다.
샹베리대학에서 5년간 철학교수로 있던 그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91년 전업작가로 나섰다. '21세기 뉴아트' 취재차 방문한 그의 아파트에는 놀랍게도 조선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프린트한 천으로 겉을 댄 소파가 놓여있었다.
"이 사람들이 누군지 알고 있는가?" "한국 사람의 모습인 줄은 몰랐다. 벼룩시장에서 발견하고 너무 아름다워 천을 샀다."
프랑스는 문인 전통이 살아있는 나라다. 철학자든 희곡작가든 소설가든 그들은 '글'이라는 매개를 통해 한 가지의 작업을 수행한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다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다. 슈미트는 왜 교수직을 그만두고 희곡작가ㆍ소설가라는 길을 택했는가 하는데 대해 "프랑스에서는 철학자가 문학을 하는 것이 전통이다.
소설은 철학의 수단은 아니지만, 살아있는 우리 인간들이 가지는 '의심'에 답하고 '의심하는 인간'을 창조해내는 허구의 세계"라고 답했다. 18세기 사상가 디드로를 전공했던 그의 이력 때문에 실제 프랑스 문단에서는 그를 디드로, 볼테르, 루소나 20세기의 사르트르까지 전해온 이 '문인 전통'을 이은 작가로 평가한다. 슈미트는 거기에다 피아노 연주자로까지 활동하고 있다.
새로운 예술은 맨 땅에서 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최근작 '빌라도의 복음서'는 보여준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 해, 그는 꼭 2,000년 전의 예수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뤄 프랑스 문단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빌라도의 복음서'에서는 예수를 사형에 처했던 로마 총독 빌라도가 주인공이다. 빌라도는 무신론자이지만 예수의 생애를 통해 진리에 다가가려 하고, 예수는 반대로 끊임없이 '내가 과연 신의 아들인가'를 질문한다.
유행하는 상업적 주제가 아니라 2,000년래의 서양 전통이라는 철학적ㆍ종교적 문제를 자신의 지식과 감수성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은 무신론 전통이 강한 프랑스인 지식인들에게 특히 충격을 주었다. 그는 "서구세계가 안고 있는 21세기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큰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90년대 한국에서는 '문학의 죽음'이 운위됐다. 작가들조차 거대 서사보다는 작은 이야기에 골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 한다." 슈미트는 이에 대해 세기가 바뀌었다고 해서 물론 갑작스런 예술의 새로움은 있을 수 없다고 전제했다.
"프랑스에서도 '문학은 죽었다'고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고등사범학교를 다닐 때 작가가 되기를 원했던 나의 친구들은 '도대체 무엇을 쓸까' 하는 문제로 고민했다. 희곡을 하는 친구들은 '새뮤얼 베케트 이후에 무엇을 쓸 수 있을까'라고 희의했다.
그러나 나는 작가는 개인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1세기 새로운 예술의 흐름이 있다면 시공을 넘어선 불변의 인간조건- 죽음, 사랑, 성 등을 자신만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작가들이 나와야 한다. 유명한 샤넬은 '유행은 변하기 때문에 유행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슈미트는 "이제 사람들은 세계에 직접 대항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며 "그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이라고 강조했다. "세계의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악조건 속에서 고투해야 하는 것이 작가"라고 그는 말했다.
93년 초연돼 몰리에르상을 한꺼번에 3개(최우수작품ㆍ최우수작가ㆍ최우수신인상)나 을 받은 그의 희곡 '방문객'은 지금까지 파리 극장에서 상연되고 있다.
'비지터'는 1938년 나치의 침공을 받은 오스트리아 빈이 무대, 심리학자인 프로이트가 자신이 꾸는 꿈을 통해 인간의식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96년에 공연된 '수수께끼의 변주'에는 프랑스의 인기 배우 알랭 들롱이 36년만에 생애 두번째로 연극 출연을 결정한 작품으로도 큰 화제가 됐다.
슈미트는 "21세기 세계문학은 어느 사회이건 커다란 사조보다는 독창적인 개인의 목소리만 난무할 우울한 모습이긴 하지만, '다른 목소리'를 들려주는 그 역할 때문에 여전히 중요하다. 문학은 세계가 아니라, 세계관을 변혁하는 것이다" 라며 자신의 희곡과 소설이 한국에도 알려지기를 바란다는 희망으로 말을 맺었다.
하종오기자
■소설 빌라도 복음서
정통교리와 다르게 본 예수의 강생과 부활
'빌라도 복음서'는 1994년에 출판된 '이기주의자들의 종파'에 이은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의 두번째 소설이다. 이 작품은 기독교가 탄생한 후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온 그리스도의 강생과 부활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작가는 기독교신앙의 이 근본 교의를 계시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혹과 불확실의 상태에서 차츰 진리를 발견해가는 긴 행로를 택한다. 일인칭의 내적 고백으로 쓰여진 이 소설의 중심 인물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아(히브리어로 예수)와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빌라도 총독이다.
2부로 나누어진 소설은 1부에서는 예수아가 감람산에서 체포되기를 기다리면서, 나자렛의 목수 아들로부터 한 여인의 사랑을 포기하고 보편적 사랑으로 자신을 바치게 되기까지의 삶을 회고한다.
여기서 예수아는 자신이 구세자임을 점차로 깨달으며, 기독교의 정통 교리와는 달리 스스로 죽음을 원한다. 예수를 배반한 제자로 알려진 유다는 예수아의 가장 신임하는 제자로 그의 신성(神性)을 확신하고 예수아의 명령에 따라 그를 고발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제2부는 빌라도 총독이 예수의 심판날부터 로마의 동생에게 쓰는 25통의 편지로 이루어졌다.
편지의 내용은 예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시체를 훔쳐갈 만한 자,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죽지 않은 그를 무덤에서 빼내 숨기고 있을 자, 부활에 대한 믿음을 선동하기 위해 예수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사람들 앞에 나타날 만한 제자들의 탐색 등 모든 기도가 실패로 끝나는 과정을 통해 합리적 사고를 하는 로마인 빌라도가 겪는 내적 변화를 서술하고 있다.
마태복음서에서 남편에게 예수 처형에 관여하지 말도록 충고하는 총독의 처는 소설에서 몰래 예수아를 따르는 신자가 되어 그의 죽음에서 십자가 가까이에 있는 네 명의 여인 중 하나로 예수가 부활한 후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 은혜 입은 여인으로 그려진다.
소설은 빌라도가 나자렛으로 예수아를 만나러 떠난, 사랑하는 아내를 찾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슈미트가 8년만에 완성한 이 소설은 그가 희곡 작품을 통해 추구해온 철학적 정신세계를 집약해 보여주고 있으며, 현대 작가들에게 소원해진 신앙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제기한 용기있는 작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이 글은 재불 번역가 조혜영씨가 요약한 것임.)
조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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