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 로마가 있다면 동양에는 장안(長安)이 있다. 7~10세기 세계의 모든 길은 장안을 향하여 달리고 있었고, 그 길은 '장안으로! 장안으로!'를 외치는 외국인들로 메워졌다. 한반도와 일본으로부터 유학생과 불승들이, 돌궐 위구르로부터 부족장과 무사들이,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왕국으로부터 사신 화가 음악가들이, 사마르칸드 인도 페르시아 아랍 등지로부터 상인들이 당(唐 618~907)으로 몰려들었다.장안은 단순히 당왕조의 수도가 아니었다. 장안은 인구 100만인 세계 최고의 국제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빛나는 문명의 중심이었다. 최신의 불교교리, 최신 시의 형식, 모범적인 각종 제도들뿐만 아니라 가장 새로운 복식과 헤어스타일까지 그곳으로부터 나왔다.
중국제국의 수천년 역사 가운데 당대는 역사상 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 제도의 발전, 사상과 종교의 새로운 시작, 그리고 모든 예술부문에서 창조성을 이룩한 시대였다. 무엇이 당으로 하여금 이런 엄청난 생동성을 갖게 하였던가. 무엇보다 당왕조가 채용한 절충주의의 덕분이다. 4백년간의 혼란된 역사를 거치면서 다양한 문화의 가닥들을 한 데 끌어 모으는 능력을 획득한 결과였다.
장안은 원래 한(漢 기원전 202~기원후 9)대 수도였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는 당대와 판이하게 달랐다. 살고 싶어 한대의 장안으로 찾아온 외국인이 별로 없었다.
외국사절도 한나라 조정이 주는 희사품을 챙겨 돌아가기에 바빴다.
당대 장안은 북위(北魏 386~556)의 수도 낙양(洛陽)을 정신적으로 물려받았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는 호족과 한족이 합쳐지면서 개방적인 문화가 뿌리내렸다.
'낙양가람기'라는 책은 당시 낙양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파미르고원에서 동로마제국에 이르는 수백 나라에서 온 대상(隊商)이나 행상들이 북위 국경을 향해서 밀어닥쳤다. 북위는 세상 구석구석에 살던 어떤 사람들도 다 받아들이는 나라였다. 중국을 사모하여 살려고 찾아온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으니 당시 귀화한 외국인만 1만여호나 되었고, 천하에 얻기 어려운 진귀한 물건들이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이런 전통의 계승이 바로 당의 국제성, 즉 외국의 어떤 인적 물적 요소도 다 수용하는 개방성을 갖게 했다. 이런 개방성은 당 문명으로 하여금 지역과 민족을 초월한 보편적인 호소력을 갖게 한 것이다. 장안은 각종 이질문화를 수용하여 배양 육성하는 문화 재창조의 거대한 공장이었다.
시인 위장(韋莊)은 '장안의 봄을 그 누군들 독점할 수 있으랴. 장안의 춘색은 본래 주인이 없는 것'이라고 읊었다. 장안의 봄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음력 정월 장안에 봄기운이 돌더니 우수가 되면 각종 꽃들이 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고 훈훈한 봄바람이 불어온다.
황성문 앞에 쭉 뻗은 주작대로를 따라 세워진 작은 탑들 사이로 멀리 남쪽 자은사(慈恩寺) 탑(大雁塔)이 우뚝 솟아있다. 탑 둘레에 불그레한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나절이 되면, 장안성은 온통 상춘 인파로 출렁이고, 새벽까지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장안인들은 모란을 특히 사랑했다. 3월 15일 전후 모란이 피는 약 20일간의 장안은 꽃 놀이꾼으로 시끌벅적했다. 모란이 마침내 지고 춘색이 사라져 갈 때 장안시민들은 떨어진 모란과 덧없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로 날이 가는 줄도 몰랐다.
사냥에서 금방 돌아 온 귀공자도, 신라 발해에서 온 유학생도, 낙타에서 막 내린 호인들도, 장안 서시(西市)에서 보석 팔던 페르시아계의 아주머니도 그 인파 속에 섞여 있었다.
그들은 꽃 냄새에 취해 술을 마셨다. 천재시인 이백의 시에는 '웃으며 들어간다. 꽃같은 호희(胡姬)가 기다리고 있는 술집으로'라는 구절이 있다. 당시 장안의 연흥문과 춘명문 주변에는 페르시아계 호스티스가 손님을 맞는 술집들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장안산 명주 외에 실크로드를 통해 수입된 페르시아산의 술도 인기를 끌었다. 그 술집에는 어김없이 소그드 출신의 댄서와 관현학을 연주하는 곱슬머리에 녹색 눈동자의 소년이 있었다.
당으로 몰려든 외국 사람들은 환락에만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당으로부터 선진문화를 습득하기에 바빴다. 동아시아 각국의 법률 제도 종교 문자 그 어느 것인들 당대 장안에서 발효되지 않았던 것이 있었던가?
장안의 거리에는 불법체류의 외국인들로 그득했다. 당왕조는 외국인에게 관대했다. 외국인 출신 공무원을 뽑기 위한 과거인 빈공과(賓貢科)를 두었던 나라가 바로 당나라였다.
외국인 가운데는 장군으로 출세한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이들을 번장(蕃將)이라 한다. 고선지 장군도, 양귀비를 사모했던 안록산도 번장출신이었다. 법률도 내렛倂뮌恝“평등했다. 근대 서구법체계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속지법ㆍ속인법주의가 채택된 시대가 바로 당대였다. 종교의 자유도 보장되어 마니교 경교 조로아스타교 등 소위 삼이교(三夷敎)가 민간에 크게 유행했다.
당왕조는 내렛倂뮌琯涌“~ 무한한 자유만을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통제장치도 준비하고 있었다. 장안은 110개의 '방(坊)'으로 구획된 격자형의 계획도시였다. 지방에도 외국인의 방이 건설되었다. 신라방이 그것이다.
방은 사면이 높고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지정된 문을 통해서만 출입이 허용되었다. 새벽과 밤에 울리는 북소리에 따라 방의 문이 개폐됨으로써 장안시민의 하루 시간표는 황제의 철저한 통제하에 짜여졌다. 야간 통행금지를 어겼을 때에는 엄벌이 내려졌다.
당왕조의 법률은 고도로 치밀해서 행정과 형벌, 모든 면을 규제했다. 장안인들이 만끽하는 자유란 것도 우리 속에 갇혀있는 '가축의 자유'였다. 단지 사람들은 이 교묘한 통제를 느끼지 못하고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을 뿐이었다.
인민통제장치였던 높은 벽의 방도 치밀한 법률도 폭발적인 인구증가와 상업의 발달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번장 안록산이 주도한 '안사(安史)의 란'이 일어나자 당왕조는 당황했다. 외국인의 활동에 규제를 가하고, 삼이교의 신앙도 금지했다.
민간에서도 중국식 국풍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흐름은 중국으로 하여금 내외인식을 재조정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지만, 당이 추구한 개방성은 이후 크게 손상되지는 않았다.
당왕조는 거대한 대륙, 수많은 인종들을 묶는 고도의 행정기구를 구축하는 한편, '세계화'를 성취한 대제국이었다. 그 중심에 장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룩된 정치적 통일을 뒷받침하는 행정기구와 내외인식은 이후 왕조의 성쇠나 교체, 이민족의 정복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유지되었다. 최근 100년간 서양의 무력과 사상을 통한 파괴적 침략에도 중국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당왕조가 구축한 행정기구의 힘이다.
당왕조가 견지했던 민족정책의 전통은 지금도 중국의 정책에 남아있다.
강제적인 동화정책을 실시했던 소련과 달리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은 우대를 통한 자연동화정책이다. 오늘날 중국인 가운데 92%를 차지하는 한족은 역사상 출현했던 90여개 소수민족이 융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중국 땅에 실재하는 55개 소수민족도 장차 이 한족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될 것이다. '조선족' 형제들을 중국에 남겨 둔 우리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이것은 역사적 필연적 귀결로 보인다.
박한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협찬 삼성전자
■'천혜요새' 관중엔 영웅들이 숨결이...
"중국대륙을 지배하려면 관중평원을 장악하라."
관중(關中)평원은 시안(西安ㆍ옛 장안)을 둘러싼 분지형 평원. 중국대륙 전체로 보면 매우 작은 지역이지만 중세까지의 중국사는 이곳을 얻으면 천하를 얻고, 다른 지역을 잃어도 이곳만 지키면 재기가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초한전쟁 당시 유방이 먼저 관중평원을 차지한 결과 힘이 훨씬 센 항우를 제압할 수 있었고 진시황도 이곳을 발판으로 동방육국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했다.
주의 호경(鎬京), 진의 함양(咸陽), 한 당의 장안(長安) 등 역대 중국의 수도가 이 곳에 자리잡았다. 송, 명도 관중평원을 수도 후보지로 생각했다.
중국 왕조가 관중평원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라는 점.
동서남북에는 각각 한구관(函谷關), 산관(散關), 우관(武關), 수관(蕭關)이 있었는데 이들 관문만 잘 틀어막으면 외부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 관중이란 이름도 네 관문의 가운데 있다는 데서 따왔다.
또 한가지는 높은 생산력. 한나라 때 관중평원의 인구가 나라 전체의 10분의 3이었는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부는 10분의 6이나 됐다고 문헌은 적고있다. 그만큼 비옥했다는 이야기다.
관중은 친링(秦嶺)산맥을 경계로 동쪽인 관동(關東)과 대비시켜 관서(關西)라고도 불렀다.
관동의 중심은 지금의 장저우(鄭州)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등. 두 지역은 문화도 달라 관서에서는 장수가, 관동에서는 재상이 많이 배출된다는 '관서출장 관동출상'(關西出將 關東出相)으로 요약된다. 관서의 무인은 한의 이광(李廣), 삼국지연의에도 나오는 마초(馬超) 등이 있고 관동의 재상은 한의 장량(張良) 당의 장열(張說) 등이 있다. 후한의 반고(班固)는 한서(漢書)에서 "관서는 오랑캐와 가까이 있어 평소에도 전쟁준비에 익숙해져있으며 기마와 활쏘기에 능하다"고 적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주 화, 토요일 아시아나의 직항기가 서울~시안을 오간다.
박광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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