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천재 이인성을 모르느냐?'화가 이인성(1912~1950)은 술이 취해 통행금지가 내려진 밤길을 걷다 경찰의 제지를 받자 이렇게 기세 등등하게 외치다가, 어이없이 경찰의 총을 맞고 서른 아홉에 최후를 마쳤다.
그리고 50년이 흘렀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과대 포장 됐었기 때문에 잊혀진 것인가, 아니면 그 스스로 밝힌대로, 또 근래 미술평론가들이 그의 작품을 '한국근대유화 베스트 10' 에 첫 손가락( '경주의 산곡에서' )으로 꼽을 만큼 뛰어난 화가였으나 제대로 조명이 안돼 소홀하게 대접받고 있는 것인가.
17일부터 내년 1월 15일까지 열리는 '근대화단의 귀재 이인성-작고 50주기 회고전' 은 이런 엇갈린 평가를 점검해 보는 소중한 기회이다. 72년 서울화랑 전시이후 28년만의 회고전으로 사후 최대 규모이다. 유화 수채화 수묵 드로잉 등 모두 95점을 전시한다.
그를 근대화단 최고화가로 자리매김하는 평론가들은 그가 조숙한 천재였다고 말한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와 동시대에 살았던 그는 사실 이들 중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냈다.
불과 17세에 당시 최고권위의 화가 등용문이었던 '선전' 에 입선을 거두며 데뷔, 이후 특선 연속 6회라는 기록을 세우며 37년 선전 최연소 추천작가에 올랐다. 10대 때 빛을 보기 시작해, 24~25세에 완숙한 기량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후기 인상주의 화풍의 그림은 강렬한 색채와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에서 특히 돋보인다. '조선 향토색'이라고 불리는 이인성의 색채는 붉은 색을 특히 황홀하게 표현한다. 경주를 일컬을 때 흔히 말하는 '맑은 하늘 붉은 땅'의 바로 그 색으로 가슴을 저미게 하는 것이다.
2차원적 평면화에서 드러내는 공간감은 놀라울 정도다. 또 그는 근대화단에서 가장 뛰어난 수채화가이기도 했다. 그의 불투명 수채화는 전문가들조차 유화인지 수채화인지 구분 못하게 할 정도로 뛰어난 기법을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이인성을 낮게 평가하는 미술사가들은 그가 20대에 잠깐 빛났을 뿐, 30대에 이르러서는 작품도 경직되고 의욕도 많이 떨어졌다고 주장한다. 일제강점기에 이국적 풍물로 선전에 영합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까지 하고 있다.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세 번의 결혼 등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한 삶을 산 그에 대해 이 준 호암갤러리 학예연구실장은 "감각도 빠르고 신출귀몰한 재주를 지녔던 작가임에 틀림없다" 고 재조명의 이유를 밝혔다.
송영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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