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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는 힐러리 지는 클린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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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는 힐러리 지는 클린턴

입력
2000.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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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레이디 조역 탈피힐러리 클린턴이 7일 열린 뉴욕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의 릭 라지오 후보에게 승리함으로써 마침내 본격적인 정치무대로 뛰어들었다.

이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됨에 따라 남편 빌 클린턴 대통령이 파란만장했던 8년간의 백악관 생활을 뒤로하고 일상으로 복귀를 준비해야 하지만 힐러리는 상원의원으로서 새로운 도약을 예고하고 나섰다.

힐러리는 이번 선거에서 여성 유권자들의 몰표를 얻은 것으로 분석됐으며 1964년 로버트 케네디 이후 뉴욕에서 외부인으로서 당선된 첫번째 상원의원이다. 퍼스트 레이디는 곧 반(半)정치인이라는 통념에도 불구하고 힐러리만큼이나 왕성한 활동과 함께 자신의 야망을 스스럼없이 내비친 여성도 드물다.

때문에 현재 가장 유력한 첫번째 여성 대통령감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런 이미지로 인해 그에 대한 평가는 `진정한 현대여성'에서부터 `극성스런 치마바람'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쳐있다. 남편 클리턴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힐러리는 유권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지지를 호소하는 등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집념을 감추지 않았다.

시카고 명문가 출신으로 예일 법대 수석졸업 변호사인 그는 대학시절 불우가정 출신의 히피족이었던 클린턴에게서 일찌감치 정치가의 기질을 예감하고 먼저 프로포즈를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1992년 대선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며 결국 남편을 백악관에 입성시켰던 힐러리는 이후 국내외를 넘나들며 정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러나 자신이 주관한 의료개혁작업의 실패, 화이트워터 연관설까지 불거지면서 결국 남편의 발목을 잡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불러왔지만 결국 1996년 대선이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복귀, 선거운동을 이끌며 클린턴을 재선시켰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의 독한 이미지를 세인의 기억속에 심어줬던 것은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 때 보여줬던 그의 꾸준한 미소였다. 이혼까지 거론되며 세인의 비난과 호기심 섞인 따가운 눈총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힐러리는 오히려 남편에 대한 지지와 신뢰를 더욱 적극적으로 밝혔다.

때문에 그는 당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도 권력에 대한 미련에 클린턴과 함께 살뿐이라는 야유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결국 클린턴은 스캔들 파장을 무마하며 임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여하간 다사다난한 일정속에서도 미국의 유래없는 경제번영을 주도한 민주당 정권뒤에는 힐러리가 함께 서있었다는 평가에는 이견이 없다. 앞으로 상원의원 힐러리가 얼마나 성숙한 정치적 행보를 보여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주훈기자 june@hk.co.kr

■지는 클린턴

7일 미국의 새 대통령이 선출됨에 따라 빌 클린턴 현 대통령은 이제 8년간의 영욕을 뒤로 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그의 임기는 내년 1월 20일까지로 두 달 이상 남아있지만 그는 차츰 `과거의 인물'이 되어가고 있다.

클린턴의 재임 8년은 마치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과 같이 스캔들과 그로부터의 회복,재난과 승리로 요동치는 격동의 세월이었다.

1992년 대선에서 당선된 그는 첫 임기 내내 화이트워터에서 트래블게이트, 파일게이트에 이르기까지 금전과 여자관계, 힐러리의 지나친 정책 개입 등을 놓고 정적의 공격에 시달렸다.

특히 부인 힐러리가 관여한 의료보험 개혁의 실패로 1994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1995년 오클라호마 연방건물 폭탄테러 사건을 능숙히 처리, 인기를 만회했다.

그는 경제 호황에 힘입어 1996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밥 돌 후보를 누르고 당선, 민주당 대통령으로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52년만에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집권 초기 클린턴은 아칸소 시골출신으로 워싱턴 정가에서 “대통령답지 못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으나 곧 역대 대통령중 지적 수준이 가장 높은 몇 안 되는 대통령으로 인정받았고, 정책 현안에 대한 이해력이 뛰어나고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비전을 제시할 줄 아는 정치인으로 인식됐다.

그는 자신의 비전과 정책을 유권자들에게 알리고 설득하는 커뮤니케이션에 능한 인물로 평가됐다.클린턴은 특히 흑인, 유태인 등 소수계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흑인계는 처음에는 남부출신의 백인이라는 이유로 클린턴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나 노벨상 수상자인 토니 모리슨으로부터 `우리들의 첫 흑인 대통령'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1998년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지면서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도덕적으로 타락한 대통령으로 추락했다. 숱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클린턴에 대해 등을 돌리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거의 1년을 시달린 클린턴은 의회 청문회 위증 혐의 등으로 궁지에 몰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미국인들은 그가 대통령직을 박탈당할 만큼 죄를 짓지는 않았다고 용서하고 말았다.

재임기간 막바지에 그는 외교분야에 힘을 쏟았다. 특히 올해 들어 마지막 치적으로 중동평화협상을 마무리 짓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비록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강경파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평화를 향한 그의 노력은 세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지난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일자리 2,200만개 창출, 25년만의 최저 범죄율, 30년이래 최저의 실업률, 사상 최고의 주택보유율, 재정 흑자 등을 자신의 치적으로 꼽았다.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생부를 교통사고로 잃고 난폭한 주정뱅이 의붓아버지 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고교시절 아칸소주 대표로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하면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 결심을 이루어내고 재선까지 한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한 정치평론가는 앨 고어와 조지 W. 부시를 그와 비교, 뛰어난 설득력과 연설솜씨 등을 들며 “미국민들은 그를 그리워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남경욱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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