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부터 사흘간 일본 시마네(島根)대학에서 개최된 제 2회 한ㆍ일 인문ㆍ사회과학 학술교류 강연회는 한국측에서 27명, 일본측에서 45명의 연구자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그런데 둘째 날인 4일 회의에서는 심포지엄 내용보다는 모두들 일본 역사의 서장을 장식하는 70만년 전의 가미타카모리(上高森)유적 발굴 사건에 관심이 집중됐다.
이 유적 발굴의 성과를 토대로 중국의 북경원인과 버금가는 전기 구석기시대가 일본에 존재했으며 층위의 연대로 보아 일본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유적이라는 일본의 자랑거리가 모두 조작된 것이라고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일본 도후쿠(東北)구석기문화연구소는 일본 선사문화 연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기관으로 국내외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일본에 구석기시대의 존재가 불분명하던 1946년 군마(群馬)현에서 2만5,000년전의 석기가 발견되었을 때 사실 여부를 놓고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도후쿠연구소가 1981년 미야기(宮城)현 이와데야마마치에서 자자라기 유적을 발굴한 결과 4만∼5만년전 석기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함으로써 의문은 사라졌다.
이러한 발굴을 주도한 후지무라(藤村) 단장은 일본의 역사를 무려 70만년전까지 올려놓은 신화적 존재이다. 그는 제6차 가미타카모리 유적 설명회에서 일주일 전에 묻어 놓은 석기 31점을 찾아냈다고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영웅이자 일본인의 긍지를 올려놓은 영웅으로 부상했다.
그동안 19개의 고교 교과서 중 10개 교과서가 그의 발굴 결과를 실었고, 일본 사립의 명문 와세다대학에서는 입학시험에까지 출제했다.
고고학 발굴을 둘러싼 역사왜곡은 다른 나라에도 있었다. 1908년 영국 서색스주 필트다운에서 발견된 사람의 턱뼈와 두개골을 두고 대영박물관이 그 연대가 50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원숭이와 현대인의 연결고리가 되는 발견이라고 흥분하면서 대영제국이 인류문명의 발상지라고 부르짖은 사건은 매우 유명하다.
그러나 1940년대 후반 불소연대측정법에 의해 과학적으로 측정한 결과 두개골은 불과 600년전 인간의 것으로 밝혀졌다. 1953년 11월 대영박물관은 “필트다운인은 속임수였다”고 공식발표했다.
일본의 가미타카모리 석기유적 날조사건도 일본 역사를 70만년 전으로 끌어올리고, 이집트 문명과 맞먹는 고대 문명이 존재했다고 믿고 싶어하는 일본인의 집단의식이 빚어낸 비극이다.
그동안 일본에는 사실에 바탕하지 않은 역사 왜곡과 미화의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일본이 4대문명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국민의 역사'라는 역사책은 70만부 이상이 팔렸다. 이 책의 서두는 바로 조작된 가미타카모리 유적으로 시작된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도 일본 고고학 관계자들은 한국측 참석자들에게 5일에는 가미타카모리 유적으로 가는 계획을 잡아 놓았으니 차질없이 해달라고 수차례 전화를 걸어 당부했다. 물론 4일의 사건 공표 후로는 그들의 연락도 두절됐지만. 하는 수없이 서울대 노태돈 교수 등 우리 일행 5명은 시마네(島根)현 이즈미(出雲) 근처의 고진다니(荒神谷)유적을 방문했다.
이 곳은 358개의 청동검(靑銅劍)이 산 사면(斜面)에서 한꺼번에 나온 곳이다. 이제까지 일본 전국에서 나온 청동검이 300개이니까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이 한 번에 나온 곳인데도 현장을 보는 순간 우리 일행은 감탄하기 보다는 약속이나 한듯이 “저것도 혹시…”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고고학적 발굴, 역사 교과서, 한일 관계사를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ㆍ일 관계를 원점부터 재정리해 나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 학계도 구석기 연구의 추정 연대나 석기의 진위, 유적의 진위여부를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임효재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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