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남 열두번째 창작집 '아주 느린 시간'소설가 최일남(68)씨가 그려보이는 `노을지경'은 장관이다. 소멸 직전의 태양은 하늘을 발갛게 물들이는 노을로써 자신의 부재를 아름답게 증명한다. 최씨는 소설로 우리 사회 노년의 모습을 노을지경에 들게 했다.
그가 한글과 한자를 조합해 만든 조어(造語)인 노을지경은 굳이 뜻을 따지지 않더라도 되풀이 발음하다 보면 자연히 그 의미가 전달될 것 같은 아름다운 여운을 남긴다. 최씨의 열두번째 소설집 `아주 느린 시간'(문학동네 발행)은 이 노을지경에 대한 보고서이다.
소설가이자 언론인으로 50여년을 살아온 최씨는 요즘 스스로도 `아주 느린 시간'을 살고 있다. `자력으로 열심히 발품을 팔아' 움직여야 하는 자전거를 타고 신도시의 이곳저곳을 자유자재로 해찰하고 다닌다. 곧은 길을 직행 질주하는 것은 오히려 `권태'라고 그는 말한다.
`아주 느린 시간'의 표제작도 이 신도시의 노년들을 그가 발품을 팔아 엿보고 쓴 절편이다. 다섯 명 노인의 대화 혹은 독백 형식으로 전개되는 일화들은 노인들의 `죽음 끼고 살기의 일상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모든 것이 젊고 풋풋할 것 같은 신도시, 더는 갈 곳이 없을 것 같은 젊은 땅에서 생의 끝내기를 놓고 고심하는 그들.
최씨는 생성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소멸의 아름다움이라 생각하는 그들의 노을지경을 묘사하면서 “도처에 이렇게 노인들이 몰려오는 장관을 아무튼 눈 뜨고 크게 보라”고 말한다.
치매를 “초월의 신천지가 눈앞이다”라고 눙치는 작중인물의 독백이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힘', “천만년 전이나 오늘이나 저마다 최초이자 최후의 실험자로 될 수밖에 없는” 죽음의 공포에 대한 대화가 영안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진', 평생을 사회 지배층으로 살다가 정년 퇴직한 이의 완전히 달라져 버린 일상을 그린 `풍경' 등 소설집에 실린 8편의 작품은 모두가 노년 연작이다.
최씨의 이번 작품집으로 이만 하면 우리도 당당한 `실버 문학'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막힘 없이 흐르는 문장, 거두절미하고 핵심을 짚어가는 대화, 해학적 표현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우리 입말이 작가의 연륜과 원숙미를 느끼게 하며 글읽는 맛을 더한다.
`글' 혹은 `책'은 이번 소설집 전체에 실린 일화들을 두루 관통하는 숨은 모티프이기도 하다. 책을 갖다 버리기도 힘든 세태를 쓴 `그들은 말했네'에서 화자는 이런 말을 회상한다. “그는 인생을 바라보기 위해 거리의 행인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보다는 행인을 바라보기 위해 책 속의 인생을 알고자 했다.” 책 속에서 멱 감던 활자세대가, 인터넷으로 밥 말아먹는 네티즌의 세상에 전하는 `책 속의 인생'은 최씨의 작품들에서 함께 얻어야 할 소중한 교훈이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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