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모(28·여)씨는 최근 지하철역에서 당한 `수모'를 떠올리면 아직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5일 오후9시 종각역에서 지하철1호선을 탄 한씨는 화장실이 급해 동대문역에서 내렸다. 아랫배를 움켜잡고 미로같은 통로와 계단을 올라가 힘겹게 찾아낸 화장실은 그러나 공사중이었다.한씨는 `다음역 화장실을 이용하면 되겠지'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다시 지하철을 탔다. 다음역인 신설동역에서 내린 이씨는 그러나 그만 화장실 앞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신설동역 화장실의 문도 굳게 닫혀있었던 것.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온 한씨는 출구 옆 건물로 들어가려 했지만 이번에는 수위가 출입을 막았다. 부끄러움도 잊은 채 통사정을 해 봤지만 수위는 “하루에도 아가씨 같은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다”며 고개를 저었다. 한씨는 결국 커피숍으로 들어가서 4,000원짜리 커피를 주문한 뒤에야 볼 일을 볼 수 있었다.
■16개역 화장실 공사중
서울 지하철 역에서 화장실 대란이 벌어지고 있다.
지하철 1∼4호선을 운영하고 있는 서울지하철공사측이 지난달말부터 화장실 개·보수 공사를 하면서 지하철역에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공사측은 임시 화장실도 마련하지 않은 채 화장실 공사를 강행,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화장실은 지하철 1호선 시청역, 종각역, 동대문역, 신설동역, 창동역, 2호선 을지로3가역, 동대문운동장역, 왕십리역, 사당역, 대림역, 종합운동장역, 삼성역, 3호선 안국역, 경복궁역, 을지로3가역, 4호선 사당역 등 모두 16개역에 달한다.
이들 화장실은 지난 23일 공사가 시작되면서 폐쇄됐고 공사가 끝나는 12월21∼24일까지 이용할 수 없다.
이처럼 지하철 화장실 공사가 대대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은 2002년 월드컵에 대비, 지하철 화장실을 선진국 수준으로 대폭 개선하겠다는 공사측의 `화장실 선진화 사업' 때문. 공사측은 화장실의 내부 마감재와 시설을 최고급화하고 장애인 전용화장실 및 유아용 보호의자 등도 설치, 세계에 자신있게 내놓을 수 있는 화장실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임시화장실도 없어 문제
문제는 화장실 공사에 대한 안내도 부족하고 임시화장실도 전혀 설치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공사로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는데도 안내표지판에는 화장실이 표기되어 있기 일쑤이다. 시민들은 화살표를 따라 열심히 화장실 입구까지 간 뒤에야 공사 안내판을 발견하곤 한다.
특히 공사측은 임시로 사용할 대체 화장실도 확보하지 못한 채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공사 관계자는 “지하철역 인근 건물주와 협의, 화장실 개방을 요청하고 있으나 건물주들이 난색을 표명하고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이동 화장실도 기술적인 문제로 역사 내에 설치할 수 없는데다 지하철역 출구 밖에 설치하는 방안도 지역 주민 반대로 난항을 겪고 있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이에따라 화장실도 없는 지하철을 이용해야 하는 시민들의 불편은 연말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지하철로 출퇴근 하는 샐러리맨 이모(32)씨는 “선진국 화장실을 선보이기 위해 두 달정도는 원시인으로 살란 말이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박일근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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