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연재 최인호 대하소설 '상도'책으로 나와A4 용지 한 장이었다. 우리 시대의 탁월한 이야기꾼 최인호(55)씨로 하여금 대하소설 `상도(商道)'를 쓰도록 유인한 것은 A4 용지 한 장도 못되는 역사의 기록이었다. 내용은 조선시대의 상인 임상옥(林尙沃ㆍ1779~1855)의 생애였다.
최씨는 그 단편적 기록을 바탕으로 임상옥과 그의 시대를 오늘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경제철학의 문제로 되살려냈다. 그가 1997년부터 3년 여간 독자들의 절찬리에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소설 `상도'가 5권의 책(여백 발행)으로 묶여져 나왔다.
한반도의 고대를 다룬 `잃어버린 왕국'과 `왕도의 비밀', 경허 스님의 이야기를 쓴 `길 없는 길' 등 근래 최씨의 역사 추적은 `상도'에 이르러 하나의 절정을 이루었다.
역사와 현재를 오가며 시대의 핵심 현안을 파고 드는 문제의식,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가는 입심이 `상도'에는 살아 있다. 상업적 철학과 도덕이라는 주제가 옛사람들의 로맨스와 어우러지며 대하소설의 등뼈를 이룬 경우는 우리 문학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상도'의 줄거리는 임상옥의 생애다. 임상옥은 200년 전인 19세기, 상업이 사농공상의 맨 아래에서 천대 받던 시대에 상업의 도(商道)를 이루었던 조선 최고의 거상이다.
국경 지방인 의주에서 보따리장사를 하는 비천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불가의 정신으로 뜻을 세우고, 자신의 인삼을 스스로 불태워버림으로써 중국 상계를 굴복시켰던 인삼왕,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ㆍ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며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던 의인이자, 말년에는 시를 지으며 여생을 보낸 시인이기도 했다.
소설은 화자인 `나'가 기평그룹 총수 김기섭이 21세기 세계시장을 겨냥해 만든 신차의 시험주행 중 사고로 사망할 당시 그의 지갑에서 나온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이라는 문장의 출처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김기섭의 호 `여수(如水)'는 이 문장에서 글자를 따 만든 것이었다.
나는 수수께끼의 문장을 추적하면서 임상옥의 생애에 다가가게 된다. 첫 인삼무역에서 큰 돈을 벌었으나 그 돈으로 유곽에서 만난 여인 장미령을 구해주고 의주 상계에서 파문당하지만, 스승 석숭 스님이 내려준 세 가지의 비결로 재기하는 임상옥.
석숭 스님의 비결이 이 소설의 주제를 꿰뚫고 있다. 스스로 죽을 각오를 해야만 위기를 물리칠 수 있다는 `죽을 사(死)'자, 부와 권력과 명예는 솥의 세 발처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솥 정(鼎)'자, 그리고 `계영배(戒盈盃)'라는 술잔이었다.
가득 채우면 잔 속의 술이 사라져버리고 오직 팔 할 정도 채워야 온전한 술잔으로, `가득 채움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뜻의 계영배는 작가가 IMF 사태 직전에 `상도'를 한국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나락이 가까운 줄 모르고 축배를 들기에 여념이 없던 한국경제에 예언처럼 던진 화두이기도 했다.
세 가지 비결의 의미가 임상옥은 물론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대학자 김정희, 풍운아 홍경래의 생애와 함께 얽히면서 소설은 대하의 물살을 타고 흐른다.
최씨는 “평소 우리나라에는 본받을 만한 역사적 상인이 없다는 기업인들의 자조적 탄식을 듣고 `상도'를 구상했다”고 말했다. 책을 묶으면서 최씨는 “아들 하나 낳은 느낌”이라고 했는데, 만년 젊은이 같은 그는 “며칠 전 외손녀를 보아 벌써 할아버지가 됐다”며 껄껄 웃었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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