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스타들 사이에 장미희(43)가 있었다. MBC 주말극 `엄마야 누나야' 의 시사회가 열린 메리어트 호텔 리셉션장에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신세대 스타들이 총출동한 듯 했다. 후배 탤런트들은 황수정 김소연 안재욱 배두나 고수 박시은 등이었다.장미희에게서는 검정색 투피스를 정갈하게 입은 데서부터 인기 절정의 후배들과는 다른 느낌이 풍겼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누렸던 20~30대의 화려함 대신 한 발짝 물러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누님처럼, 여유를 거느리고 있었다. 많은 기자들이 황수정 같은 젊은 연기자에게 몰려가 인터뷰를 할 때도 잔잔한 웃음만 짓고 있었다.
“이제는 일보다 인간적인 정이 참 좋아요. 누군가 저를 필요로 하는 손이 있으면 조용히 가서 잡아주고 싶지요.” 흔히 가성(假聲)으로 오해되기도 하는 그 특유의 목소리로 4일부터 방송한 드라마 `엄마야 누나야' (조소혜 극본, 이관희 연출)에서 이전과 전혀 다른 배역을 맡은 이유를 말한다.
젊은 여성과 중년 여자들의 고단한 삶을 통해 가족애를 그리는 `엄마야 누나야' 에서 대리모, 영업소장과 눈맞아 도망가는 영업사원, 다방 마담, 꽃뱀 등 다중적 성격을 연기해야 하기에 주위에선 장미희 이미지가 `망가질 수 있다' 고 출연을 만류했다.
“해보지 않은 새로운 배역은 위험 부담이 있어요. 어차피 삶이란 가능성에 대한 도전의 연속 아닌가요. 도전을 포기하는 것은 늙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아닌가요.”
시사회가 시작되자 그가 긴장한다. 자신의 모습에 소름이 끼친다며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라며 아쉬움을 표시한다. 시사회가 끝나고 옆 좌석에 있던 선배 나문희가 “정말, 잘 어울린다” 라고 말을 건네자 얼굴을 붉힌다. 75년 여고 재학 시절 춘향이 선발대회 입상을 계기로 연예계에 데뷔해 70~80년대 유지인 정윤희와 함께 트로이카 시대를 이끌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스타도 화면 앞에선 결코 초연할 수 없는 모양이다.
본인의 조바심과는 달리 극중에서 그의 작은 손 떨림 하나, 세밀한 표정 연기가 드라마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그는 자신의 캐릭터뿐만 아니라 상대 배역을 꿰뚫는 치밀한 계산으로 연기를 하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싶지만 온몸을 던져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아직까지 미혼입니다. 집에서 자식 같은 개 아홉마리와 고양이 여섯마리를 정성들여 키워요. 일마치고 돌아갈 때 애완동물들이 반겨주면 기분이 묘해요.” 1회분에 그가 출산하는 장면을 상기시키자 “저도 아이를 갖고 싶지요…” 라며 말꼬리를 흐린다.
그가 명지대 사회교육원 연극영화과에서 `영상창작실습' `연기실습론'을 강의한 지 11년째에 접어 들었다. “생활의 활력소입니다. 가르치는 것보다 젊은 학생들에게 배우는 것이 더 많아요. 교정에 들어서면 연기하면서 힘들었던 것이 순간에 사라져요. 나이보다 젊게 보이는 것은 순전히 학생들과 만남 때문이지요”
작품마다 배우 출연료의 최고액을 갱신하며 인기와 스캔들의 정점에 섰던 대스타 장미희는 질문 하나 하나에 진지하게 대답하는 성실성을 보여 주었다. 그는 지금도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면 젊었을 때처럼 긴장과 즐거움을 느낀다고 한다.
배국남기자 knb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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