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년 오늘 조선조 10대 임금 연산군(재위1494-1506)이 유배지인 강화의 교동에서 병사했다. 향년 31세. 연산은 조선조의 가장 일탈적인 군주일 것이다.그의 12년 치세는 초기의 서너 해를 제외하면 피비린내로 어지럽다. 연산군 일기의 편찬자들이 폐주(廢主)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이어서 그의 악행을 과장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매우 특이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성격의 포악함과 잔인함, 성애(性愛)에 대한 엽기적 집착, 그런 탈규범을 때로는 순화하고 때로는 강화한 시심(詩心) 등이 인간 연산의 이미지를 이룬다.
연산은 무오년(1498)과 갑자년(1504년)에 두 차례 사화를 일으켜 서울을 인간 도살장으로 만들었다. 그 사화의 화살은 당시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 사류(士類)와 한 때 그의 지지자였던 훈구파만 아니라, 조모 인수대비를 포함한 자신의 친인척에게까지 겨누어졌다.
그 화살은 또 이미 죽은 사람에게까지 겨누어졌으니, 연산의 어머니 윤씨의 폐비에 찬성했다 해서 부관참시를 당한 한치형 한명회 등이 그 예다.
연산의 성격이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불우했던 성장기에 뒤틀린 것인지는 인류 지성사를 관통해온 선천성 대 후천성 논쟁의 한 케이스가 될 법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연산의 퍼스낼리티에서 어떤 기시감을 겪는다. 그의 포악함, 그의 엽기적 성애, 그의 어설픈 문학적 제스처는 혹시 우리의 대통령들이 다소 느슨한 형태로 나누어 가졌던 기질들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를 다스리고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한두 가지 점에서는 병자인지도 모른다. 민주주의가 절대군주제보다 나은 것은 권력자의 그런 병적 성격이 정치과정 속에서 실현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장치를 지녔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