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올림픽 역도 4연패 정금종전화선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따뜻했다. 지난 번 시드니 장애자올림픽 역도 52㎏급에서 또 우승, 4연패에 성공한 정금종(鄭錦宗?35)씨다. 84년 첫 출전한 뉴욕 장애자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그는 88 서울장애자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더니 92년 바르셀로나, 96년 아틀랜타에 이어 시드니에서도 우승했다. `정상인'도 이루기 어려운 대기록, 쉽게 깨지지 않을 위업을 쌓았다.
`만나고 싶다'는 전화를 걸었더니 선선히 응하는 목소리가 아주 밝았다. “네, 이리로 오세요. 지금도 괜찮습니다.”19박 20일의 시드니 체류를 마치고 밤 비행기 편으로 도착하자마자 받은 전화건만 전혀 불편해 하는 기색이 없었다. 불편한 기색은 커녕, 듣는 사람의 기분까지 맑게 하는 목소리였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난곡 마을 그의 처가에서 그를 만났다. 부드럽게 말문을 연답시고 “목소리가 밝다. 원래 성격이 그러냐”고 물었더니 “아니다. 원래는 아주 내성적이어서 말도 제대로 못했는데 운동을 하면서 바뀌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그의 운동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다.
운동하면서 성격도 밝아져
“역기는 15살 때 처음 잡았다. 장애인 역도가 처음 보급됐을 때였다. 재활원 선생님이 한 번 해보라고 해서 시작했는데 80년 전국장애인체전에 출전, 얼떨결에 은메달을 따고 나서는 신이 나서 계속하게 됐다.
그런데 계속 하다 보니 내 성격이 바뀌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사람 만나기를 두려워했는데 운동을 하면서 대인관계가 좋아졌다. 누구를 만나도 겁이 안 나고 오히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찾아서 만날 정도로 적극적이 되었다.”
(그는 한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도 뒤이어 집을 나가 친척들이 키웠다.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린 그는 친척에 의해 서울 상도동 부근에 있던 삼육재활원에 맡겨져 거기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기억이 안 나고 어머니는 그 뒤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의 장애인 올림픽 역도기록은 190㎏. 52㎏급에서는 세계 기록이다. 장애인 역도경기는 긴 벤치에 누워서 들어올리는 `벤치 프레스'로 진행된다. 일반인이 헬스크럽에 처음 나가면 30㎏ 정도의 벤치 프레스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니 그의 힘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들어올리지는 못했다.
연습의 결과다.” 그는 일주일에 3일, 하루 4~5시간 연습을 한다. 연습 날 하루에 들어올리는 역기의 무게를 다 합하면 3톤은 넘는다. 굵은 팔뚝과 두툼한 가슴둘레 등 다부진 상체는 `역사(力士)'의 모습 그대로다.
장애인에 운동 더 필요
_그렇게 운동을 해도 괜찮은가. 안 그래도 불편할 텐데?
“운동은 정상인 보다 장애인에게 더 필요하다. 나처럼 다리가 불구인 사람들은 목발에 의지하게 되는데 오래 되면 체중이 불고, 몸이 뒤틀리게 된다.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운동을 하면 체중이 조절될 뿐 아니라 몸에 균형이 잡혀 자세가 바르게 된다.
`스포츠는 정직하다. 노력한 만큼 거둔다 '는 말은 정말 장애인에게 들어맞는 말이다. 운동을 하면 또 자신감이 생겨 나처럼 성격도 고칠 수 있지 않은가. ”실제 그는 기자와 두 시간 가량 마룻바닥에 앉아 대화를 나누면서 한 번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을 정도로 꼿꼿한 모습이었다.
_운동할 때 어려움이 뭔가.
“운동 자체의 어려움이 뭐냐는 질문이라면 체중 조절이다. 정상인처럼 달리기 같은 운동으로는 체중 조절을 할 수 없어 금식 단식이나 사우나만으로 체중을 조절해야 한다. 보통 때 몸무게는 69㎏인데 대회에 나가려면 17㎏을 줄여야 한다.
대회를 앞두고는 며칠 전부터 하루 두 끼만 먹어야 한다. 보통 고통이 아니다.” 체급을 올리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동일체급 올림픽 4연패라는 기록이 욕심이 났고, 자신의 정상 체중인 69㎏ 대에는 동료가 이미 대표선수로 선발되어있어 양보도 해야 하는 사정이었다고 말했다.
_5연패에 도전할 것인가.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내 개인의 즐거움과 성취욕 때문에 기를 쓰고 운동을 해왔는데 20년이 지나고 보니 우리나라 장애인스포츠에 내가 해놓은 게 없는 것 같아 앞으로는 그런 일을 해보고 싶다. 그런 반면 내가 4연패를 한 체급을 이어줄 후배가 없으니 앞으로도 더 출전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장애인 체육시설 유명무실
그는 20년 전 자신이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장애인 체육환경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힘으로 이를 조금이라도 고쳐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여태 따뜻하고 밝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88 서울장애인올림픽을 열면서 여러 곳에 장애인 전용 체육시설을 만들었지만 정작 장애인들이 운동을 하려면 여간 힘이 들지 않는다. 장애인 시설이라면서 대부분의 시간에 일반인들만 받고 있다. 걸리적거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은 점심시간 때나 겨우 운동을 할 수 있는 형편이다. 여유가 있는 장애인들은 일반 헬스크럽에서라도 운동을 하려하지만 대부분 4~5층이나 지하층에 자리잡고 있어 접근이 어렵다. 운동이 몸과 마음에 좋다는 것을 느끼는 장애인은 점점 늘어나는데 제대로 시설을 이용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
그는 또 앞으로 일반 시설을 많이 이용하면서 장애인도 일반인 못지 않게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몸으로 부딪히면서 보이겠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얼마 전부터 몇 몇 헬스크럽을 일부러 찾아 자신의 힘을 `과시'해보이고 있다.
“처음 가는 헬스크럽에서는 물론 눈치가 좋지 않다. `저 꼴에 무엇을 할까'라는 듯한 표정이 보인다. 그렇지만 내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무거운 것을 드는 걸 보면 금방 달라진다. 어떤 사람들은 운동 요령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나의 그런 행동이 장애인에 대한 일반의 시각을 조금은 바꿀 것으로 믿는다.”
선수연금 한달 고작 43만원
그는 머리를 빡빡 밀고 있었다. 시드니로 출발할 때 동료 선수들과 함께 민 것인데 대회를 앞두고 각오를 새롭게 한다는 뜻도 있었지만 항의의 표시이기도 했다.
“무슨 항의냐고? 선수단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시위였다. 우리도 국제적 행사에 국가를 대표해 참가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원이 너무 형편없다. 정규 올림픽 출전선수는 2년 가까이 선수촌에 입촌해서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는 등 엄청난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받지만 우리는 고작 한 달 훈련하고 떠난다.
동메달 한 개, 금메달 3개를 딴 내가 받는 장애인 선수 연금이 얼마인지 아는가. 한 달 43만원이다. 이번 것을 포함하면 조금 늘어나겠지만 정규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한 개만 따도 한 달에 100만원을 받는다. 이건 차별 아닌가. 정부가 먼저 차별을 하는데 대한 항의로 모두 머리를 깎았다.“(기자가 나중에 알아보니 정규올림픽에서 그와 같은 성적을 얻을 경우 일시불 1억3,000만원에 매월 100만원을 연금으로 받게 되어있다.)
그는 표시는 안 했지만 언론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이번 시드니 장애인 올림픽에는 세계 150여 개 국이 참가했다. 선수단 규모도 수 천명이나 되었던 이 대회에서 우리 대표단은 종합 9위를 했다. 국가적 지원을 받은 정규 올림픽에서는 12위를 하지 않았는가.
지구촌의 또 다른 축제에서 우리나라의 또 다른 면모를 과시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우리 언론은 우리를 외면했다.TV 중계팀이 따라왔지만 생중계는 한 번도 안 하지 않았는가. 연속극은 재탕 삼탕하면서‥.”
그가 접은 말꼬리 속에는 “너희는 그 동안 무얼 했느냐”는 힐난이 감춰져 있었다. 그래서 이 글은 반성문이다. 그에게 밝은 목소리만을 기대하며 찾아간 오만과, 그들의 잔치를 그들만의 잔치로 여겨온 무지를 부끄러워 하면서 쓴 글이다.
■그와 가족이야기
그는 꿈은 딸들이 잘 되는 것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맏딸 유진(5)이는 공부를 제대로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고 둘째 예진(2)이는 자신처럼 운동선수가 되기를 바란다. 맏이 이름은 친구가 지어주었다.
나중에 외국유학을 가게 되면 외국사람이 부르기 좋으라고 지어준 이름이다. “첫 딸을 낳았을 때는 정말 기뻤다. 새삼 나에게도 가족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아빠 목에 매달려 온갖 재롱을 부리는 그의 두 딸이 유난히 귀엽고 예뻤다.
85년 재활원을 찾아와 만나게 된 최영숙(崔英淑? 33)씨와는 9년 뒤인 94년 결혼했다. “장모께서 처음엔 장애인에게 어떻게 딸을 주느냐고 반대를 하시더니 결국엔 결혼을 허락하셨다.”그는 결혼 후 동료장애인들과 서울 변두리 건물 넓은 지하실을 빌려 공동체생활을 했다.
그러나 집주인이 계속 집세를 올리는 바람에 얼마 전부터는 부인과 딸은 처가에 맡기고 자신은 경기 고양의 `다솜의 집'에서 기거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처가를 찾아 가족과 함께 보내지만 처가 식구들에게 미안해 오래 있지는 않는다.
그의 한 달 수입은 51만원. 장애인 선수연금 43만원과 지난달부터 시작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른 급여가 8만원이다. 기초생활보장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1종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되어 한 달에 32만원을 받았는데 이 법이 시행되면서 오히려 줄어들었다. “가족은 처가에서 숙식을 해결해주고 있으니 급여지급 대상이 아니다”라는 당국의 해석 때문이다.
그는 재활원에서 금은세공, 양재, 조각 등의 기술을 배웠지만 그걸로 생활을 꾸려보지는 않았다. 운동에 열중하다 보니 운동이 직업처럼 됐기 때문이다. 실제 그는 직업난에 `다솜의 집 대표'라고 적는다. 다솜의 집은 자폐아와 정신지체아들에게 체육을 가르치는 곳으로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95년부터 운영해오고 있다.
“자폐아와 정신지체아들에게 단순기술을 가르쳐 사회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이 있지만 그건 말이 안 된다.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체육이다. 운동을 훨씬 더 좋아하는 걸 내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자기 딴에는 자폐아와 정신지체아를 도우면서 사업으로도 가능하다고 보고 시작한 일인데 워낙 없이 한 일이라 아직 집에 한 푼도 갖다 주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누가 약간만 도와주면 성공할 수 있다고 본다. 제대로 사업계획서도 꾸며 놓았다. 듣고 보니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어디 자폐아나 정신지체아 뿐인가. 교통사고 등으로 인한 후천적 장애인들도 제대로 된 운동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면 정신과 육체적으로 재활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처럼 장애인의 처지를 잘 아는 사람이 운영한다면 그 장점도 적지 않을 터다. 그는 제대로 꾸민 사업계획서도 있다고 말했다. 곤궁하기만 현실 속에서도 자신과 가족을 위한 돌파구를 꿈꾸어 보는 그가 정말 벤처기업가로 생각되었다.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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