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더께'는 분노를 연민으로 바꾸나너무나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남편. 그러나 밖에서는 살아 남기 위해 너무나 비굴하게 구는 남편. 참고 살던 아내는 어느 때인가부터 남편에 대해 적의를 느낀다. 언젠가는 헤어져 혼자 살기를, 아니면 복수를 꿈꾼다. 늙어서 봐라. 아파도 눈이나 깜짝 하나 봐라. 백살도 넘어 살 것 같은 저 인색함이란. 저 꼴 보기 싫어서라도 내가 빨리 죽어야 할텐데.
많은 아내들은 이렇게 말하거나 생각한다. 그래서 황혼이혼이 늘고, 한 집에 살면서도 필요한 말만 하고 딴 방을 쓴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 노인들은 함께 산다. 늙어가면서 남편의 못된 성격, 무신경한 태도, 추레한 모습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다. 차라리 멋지게 성공해 보란 듯이 노후를 맞이했으면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라고 하면서 외면했을 텐데.
그 남편이 어느날 숟가락질을 제대로 못해 밥을 흘린다. 정말 거지가 돼 나타나거나, 아파서 누웠다. 이제 아내의 복수가 시작되는구나. 그러나 아내들은 그 기대를 배반한다. 아니 자신을 배반한다. “인생이 불쌍하다. 그나마 내가 돌보지 않으면 누가 저 인간 거들떠라도 보겠느냐. 저 영감보다 내가 조금 늦게 죽어야 할텐데.”
박완서씨는 `연민'이라고 했다. 스스로 가부장적인 문에 얽매여 의무감으로 모든 것을 바치고 초라해진, 살을 맞대고, 같이 자식을 책임지면서, 세월을 공유해온 남자에 대한 측은한 마음. 약자를 동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연민은 세월을 공유하지 않고는 생기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연민이자, 늙음과 삶의 허망함에 대한 연민이다. 모성을 자극하는 연민이야말로 여성성의 고귀한 부분이다.”
그의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 은 연민들로 가득하다. 그의 연민은 때론 노추를 잔인하게 폭로하며 확인시키고, 때론 세월의 상처를 쓰다듬는 손길이 되고, 아직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열정이 된다. 늙음을 아는 자, 아니 늙음을 가진 자가 아니고는 그 늙음 속에 깃든 아름다움을 알 리 없다.
단편소설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 아내도 시골아이들 꽁꽁 언발을 세워놓고 졸업식에서 장장 반시간 이상 연설을 하는 초등학교 교장인 남편이 죽도록 미웠다. 그래서 딸의 대학진학을 핑계로 별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들 졸업식 날 그는 허방을 밟듯이 사돈에게 아들을 빼앗겼다는 상실감을 느끼고는 남편을 택시에 밀어 넣고는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러브호텔로 간다.
어느새 신도시까지 쳐들어온 러브호텔. 그만큼 사랑할 공간이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할 사람을 잘못 만나 모두들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일까. 가을 한강 변을 따라 이어진 러브호텔에서의 사랑은 비닐판으로 가린 자동차 번호판만큼이나 엉성하게 `욕정' 을 숨기려 한다. 그러나 초로의 아내는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자신의 `욕정'이 아니었다. 일생을 헛 산 것 같은 허전함, 그래서 검부러기라도 움켜잡듯 한 것이 고작 그토록 지긋지긋해 했던 남편의 정강이에? 다.
군데군데 모기 물린 자국이 있는 그 초라한 정강이를 보고는 연민이 목구멍으로 뜨겁게 치받쳐 오는 것은 바로 그 모습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세월의 때가 낀 고가구를 어루만지듯 남편의 정강이를 어루만지면서 그는 자신의 늙음으로 그 늙음 뒤에 남겨진 허방의 인생을 어루만진다. 작가는 말한다. “이를 누가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가.”
늙은이의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적어도 같이 아이를 만들고, 낳고, 기르는 그 짐승 같은 시간을 같이한 사이' 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닥칠 늙음의 속성들, 이를테면 기름기 없이 처진 속살, 우수수 떨굴 비듬, 게걸스런 식탐, 의처증과 건망증이 범벅이 된 잔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단편 `마른 꽃' 의 주인공은 딸의 은근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조박사와의 결합을 단호히 거부한다.
아차산의 단풍이 늦가을 햇살을 받아 더욱 붉다. 15년 전 박완서씨는 그 산자락에 삼태기처럼 담긴 아치울 마을(경기 구리시 아천동)에 집을 장만했다. 그동안 작업실로 쓰다 2년전 집을 새로 지어 아예 이사를 왔다. `노후에 마음 붙일만한 곳'을 찾다, 이이화씨에게 한문을 배우러 오다 마음에 들어 자리잡은 곳이다.
잡목으로 우거진 아차산 밑으로는 실개천이 돌아나가고, 몇 년전만 해도 마을 앞 논에서는 개구리가 우는, 시인 정지용의 `향수' 같은 마을. 특별한 풍경도 아니다. 어릴 때 그가 살던 고향도 이랬고, 단편 `환각의 나비' 에서 치매에 걸린 영주 어머니가 나비처럼 날개를 접고 자유롭게 쉬는 마을이기도 하다.
영주는 작가의 친구이다. 친구는 몇번이고 집을 나간 어머니를 데리고 왔다. 그러나 끝내 그 어머니는 모습을 감추었다. 방송을 하고, 전단을 붙이고, 전국을 뒤져도 끝내 어머니를 찾을 수 없었다. 친구는 치매에 걸려서도 빨래를 깔끔하게 개고 채소를 다듬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익힌 따뜻하고 여문 손길을 그리워한다고 했다. 그 친구에게 위로가 되라고 이 소설을 썼다. “너의 어머니는 편안한 곳에서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린 그 가벼움, 그 자유로움으로 어디 낯익은 마을, 천개사 포교원 같은 곳에서 지낼 것” 이라고.
천개사 포교원이란 낡은 집도, 그 집이 있는 원주민 동네라는 곳도 실제는 없다. 아니 이런 마을과 집은 어디든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 자신이 사는 아치울만 해도 몇 년전 마을 곳곳에 이런 집이 있었다.
옛날 영주 어머니가 하숙을 치던 종암동 낡은 집도 다를 게 없다. 그의 가출은 고생스런 기억으로의, 고달프고 추웠지만 어머니로서 살았던 시간으로의 회귀이다. 작가는 모든 게 빨라진 시대가 시간에도 영향을 미쳐 노인들의 자연스런 기억상실과 평화를 깬다고 했다. 그래서 영주의 어머니처럼 시간이 고여있던 유년시절의 공간으로 숨어버리는지 모른다고 했다.
“어떤 얘기든 내 얘기처럼 쓰지만, 이 소설들만큼 편안하게 쓰고 읽은 적은 없었다” 는 박완서씨. 아직도 글쓰기를 즐기는 그는 곧 일흔이 된다.
글ㆍ이대현기자 leedh@hk.co.kr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은
작가는 서문에서 “젊은이들 보기에는 무슨 맛으로 살까 싶은 늙은이들 얘기가 대부분이다. 늙은이 너무 불쌍해 마라. 늙어도 살 맛은 여전하단다. 그래 주고 싶어 쓴 것” 이라고 했다.
`너무도 쓸쓸한 당신' 은 박완서씨의 일곱번째 창작집이다. 18년 전 `엄마의 말뚝' 에서 시작한 소설 위의 시간은 그 `엄마' 를 지나 어린 딸이 엄마가 되고, 엄마가 다시 할머니가 된 곳까지 흘러왔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사는 것을 맛있어 하면서 산다.
늙음의 육체적 추함을 감출 수 없듯 그는 “쓰고 불편한 것의 맛을 아는 게 연륜이고, 나는 감추려야 감출 길 없는 내 연륜을 당당하게 긍정하고 싶다”고 했다.
9편의 단편은 어쩔 수 없는 그 추함에 대한 쓸쓸함과 연민이다. `우리도 느끼고 재미있어 하고 그런단다” 고 말하는 사는 맛에 대한 이야기이다. 연애감정은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정열이 비어있기에 `마른 꽃' 은 늙음의 속성을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없음을 안다. `환각의 나비' 는 가족으로부터 떠나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린 치매 노인의 모습이다.
평생 난봉꾼으로 애정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없이 살아온 남편을 받아들이고 죽어가는 어머니는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들의 관계와 삶은 `난해한 영화' 이기에 딸은 다시 한번 아버지를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 싶어한다. 처가에 절을 하며 사는 아들의 졸업식에서 만난 별거중인 남편의 초라한 모습, 그것이 다 못난 제 팔자 탓이라고 경멸하면서도 정강이의 모기 물린 자국에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을 본다.
그렇다고 그의 노인이야기가 `꽃잎 속의 가시' 처럼 가족 속에서의 존재와 죽음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꽃잎 속의 가시' 의 기막힌 사랑의 사연을 통해 정신대문제를 슬쩍 건드리기도 하고, `J-1' 비자를 가지고 한국을 보는 미국의 시각에 분개한다. 늙었다고 마음과 생각까지 함께 늙었다고 하지 마라.
작가연보
▲1931년 경기 개풍 출생
▲숙명여고 졸업,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학업중단
▲1970년 장편소설 `나목' 으로 등단
▲소설집 `배반의 여름'(1978년) `엄마의 말뚝'(1982년) `꽃을 찾아서'(1986년) `저문 날의 삽화' (1991년)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년)등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1977년) `도시의 흉년'(1979년) `오만과 몽상'(1982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3년) `미망'(1990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992년)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1995년) `아주 오래된 농담' (2000년)등
▲수필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1977년)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1990년)등
▲한국문학작가상(1980년) 이상문학상(1981년) 대한민국문학상(1990년) 현대문학상(1993년) 동인문학상(1994년) 보관문화훈장(1998년) 만해문학상(1999년) 인촌상 문학부문(2000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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