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덕수궁에서 프랑스 근대미술의 꽃이 활짝 피어나고 있다.26일부터 시작돼 내년 2월 27일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는 `오르세미술관 한국전'은 세계 명화 중에도 우리에게 친숙한 밀레의 사실주의 회화 `이삭줍기' 부터 인상파 그림 등을 화사하게 보여준다. 이런 규모의 인상파 그림들이 한국에 오는 일은 유례가 없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기대하기 어려울 듯하다.
밀레, 쿠르베의 사실주의부터 마네,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의 인상파, 세잔, 고흐, 고갱 등의 후기인상파까지 19세기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전시회화의 미술사적 의미와 `오르세역' 이라는 철도역에서 우아한 미술관으로 개조된 오르세미술관 이야기, 전시작품 소개 등을 2개면에 걸쳐 특집으로 싣는다.
여기 붉은 색 사과가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망막과 사과의 표면 사이엔 보이지 않는 빛의 흐름이 있다. 그 빛을 추적한 것이 바로 인상파 화가들이다. 빛은 늘 한 빛이되 인상파 이전과 이후의 `빛'은 확연히 달랐다. 밤과 낮을 구분하는 자연의 원리로서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인식과 이미지를 결정하는 빛에의 집착과 해부는 인상파 화가 작업의 핵심이었다.
인상파를 태동시킨 것은 바르비종파였다. 1848년 2월 혁명시기, 몇 화가들은 퐁텐느블로 숲 인근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에 모여 자연을 새롭게 해석한 그림을 선보였다. 농부나 노동자등 하층계층의 모습을 성화처럼 그린 밀레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그것은 아름답지 않은 것도 그림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사실주의의 선언이었다.
이런 태도에 더해 자연의 그대로의 움직임을 화폭에 담으려는 노력이 바로 전기 인상파를 형성하게 된다. 전기 인상파는 에두아르 마네가 일으킨 두 가지 스캔들을 통해 더욱 확산된다. 1863년 `풀밭 위의 식사', 1865년 `올랭피아'는 파격적 소재에 대한 작가의 냉소적인 시각으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두 그림에서 나타난 광선의 포착은 만물을 주관하는 빛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후 마네는 모네, 르누아르와 함께 아르장테이유의 산~? 들, 바다에서 새로운 빛의 작업에 몰입하게 된다. 1870년 보불전쟁으로 일단의 화가들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전사하기도 했는데, 화상인 폴 뒤랑 뤼엘은 쿠르베와 마네를 후원했다. 화가들의 뒤에는 늘 `패트론'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 그림은 살롱전에서 계속 낙선했다. 세잔, 모네, 드가, 시슬레, 피사로, 르누아르 등은 1874년 165점의 작품으로 그들만의 전시회를 열었다. 모네의 `인상, 떠오르는 태양'의 작품 제목을 패러디, 한 기자가 약간의 냉소를 덧붙여 “인상적”이라고 평한 것이 `인상파'의 유래가 됐다.
1880년대부터는 빛의 장난에만 안주하지 않았다. 에밀 졸라가 `실패한 천재'라고 부른 세잔은 색채가 부리는 조화 속에 휘둘리는 대신 새로운 원근법, 인물과 오브제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시도했다. 이 경향은 이후 야수파와 입체파에게 전수된다.
피사로, 시냑, 고갱, 베르나르, 로트렉에서 빛과 색을 빌려와 화려하게 꽃을 피운 고흐, 그가 존경해 마지 않았던 고갱에 이르러 인상주의는 만개한다. 빛의 소용돌이를 통해 색을 희롱하는 고흐, 원시적 색채 미학의 정점을 짚었던 고갱을 통해 인상주의는 비로소 당대의 대표 화풍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어떤 장르도 처음부터 환영받는 경우는 드물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가격으로 경매에 부쳐지는 인상파 그림 역시 처음에는 출발이 `이단'적 이었던 것이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오르세미술관은 어떤 곳
파리 세느강을 사이에 두고 루브르박물관과 마주보고 있는 오르세미술관은 밀레의 `이삭줍기'에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에 이르기까지 19세기 말과 20세기초의 미술 걸작을 가장 많이 소유한 곳이다.
특히 마네, 모네, 시슬레, 르누아르, 세잔, 고흐, 고갱 등 인상파의 작품을 많이 소유하고 있어 `인상주의 미술관'이라고도 불린다. 르네상스에서 고전주의, 로코코 시대의 미술을 소장한 루브르박물관, 현대미술의 상징인 퐁피두 센터를 미술사적으로 연결하는 곳이기도 하다.
오르세미술관는 1900년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빅토르 랄루에 의해 세워진 오르세 철도역사와 호텔을 개조해 만든 것이다. 1939년 역사가 폐쇄된 이후 이 건축물은 세기말의 타락한 취향을 상징하는 기괴한 건물로 취급받기도 했다.
1970년대 퐁피두 정부 때 이곳을 미술관으로 개조하자는 구상이 제안된 후 데스텡 정부, 미테랑 정부로 이어지면서 계속 추진돼 1986년 미술관으로 개관했다. 파리의 에펠탑, 그랑팔레와 함께 한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송용창기자 hermeet @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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