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널려 있는 운동복들과 구석에 내팽개쳐진 낡은 대걸레 자루가 제격인 투박한 복싱체육관. 한 젊은 여성이 열심히 샌드백을 두들기고 있다. 날씬한 몸매의 미인이라 살빼기를 위한 것만은 아닌 듯 하다.온갖 상상이 꼬리를 물고있을 때 체육관 코치가 조용히 와서 한마디 해준다. “저 아가씨,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프로복서라우. 혹시 영화나 TV에서 본 적 없수?”
화제의 영화 `노랑머리(99년)'에서 이재은과 짝을 이뤄 개성있는 연기를 펼쳐 주목을 받았던 여배우 기연(25ㆍ본명 김기연)이 국내 최초의 여자프로복서로 탄생했다. 기연은 지난 달 27일 여자프로권투선수 테스트전을 당당히 통과해 권투관계자들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뺨을 때리는 일조차 어설픈 여배우들의 엉성한 액션연기를 극복하고 싶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올 1월 와룡권투체육관(관장 윤석정)을 무작정 찾아와 권투를 시작했다. 촬영때문에 바쁜 일정에도 1주일에 2~3번은 항상 체육관을 찾아 연습을 할 만큼 권투의 재미에 푹 빠져 있다.
8월 초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에 오른 입양아출신 재미한인 여자복서 킴메서를 가장 좋아한다는 기연은 여성권투 예찬론자임을 주저하지 않는다. “헬스, 수영 등 많은 운동을 해봤지만 그중 권투가 최고”라며 체중조절, 피부관리 등 여성의 생활체육으로 더 할 나위 없이 좋다고 주변 친구들에게 항상 추천한다. 하지만 정식 경기에 나설 계획은 아직 없다.
연습도중 언뜻언뜻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은 연기가 아닌 진짜 권투선수의 모습이다. 때로는 `엽기적'으로 느껴지던 권투가 요즘은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기연. 먼훗날 여성만을 위한 국내최초의 여성체육관 관장이 되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더니 대답이 뜻밖이다.
“어머! 왜 아직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
/글 이준택기자 nagn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