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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옛문화를 찾아] (8) 상하이(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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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옛문화를 찾아] (8) 상하이(上)

입력
2000.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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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도시이자 상업도시, 공업도시, 과거의 외세(外勢)도시인 상하이가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42년부터다. 아편전쟁 후 체결된 난징조약에 의해 개항구(開港口)가 되었기 때문이다.일부러 1842년에 세워진 리처드슨호텔에 머문 적이 있다. 지금은 삼류호텔이 되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상하이 최초의 호텔이며 영국인이 중국에 최초로 세운 영국식호텔이기 때문이었다. 그 호텔은 서양식 건물이 많은 와이탄(外灘)의 북쪽 상하이따샤(上海大厦) 옆에 있다.

상하이에는 좋은 서양식 건물이 많은데 쑨원이 살던 집(孫中山故居)도 프랑스 조계에 있던 2층 벽돌 양옥이다. 향산로 7호에 있는 이 집에서 그는 1918년부터 6년간 살았다.

남쪽 잔디밭과 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집은 검소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주었다. 물론 이 집에서 쑹칭링도 함께 살았다. 쑨원의 행복한 만년이었다. 쑨원이 간암으로 죽은 후에도 쑹칭링은 13년을 더 이 집에서 살았다.

이곳에 있는 가구와 집기는 해방(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쑹칭링이 직접 수집해 배치한 것이어서 1920~30년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쑨원과 쑹칭링 부부는 여기서 수많은 정치가와 신문기자 등을 접견하였고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사진도 많이 걸려 있었고 유물도 많았는데, 대원수복(大元帥服)을 입은 쑨원과 대원수 지휘도(指揮刀)가 인상적이었다. 이 집은 1961년 3월부터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가 되었고, 표지석도 세워졌다.

상하이에서 제일 오래된 명소는 역시 위위엔(豫園)이라 하겠다. 1577년에 완성된 대저택인데, 강남의 특색을 갖춘 원림(園林: 정원)이기도 하다. 상하이 사람들은 쑤저우에 있는 4대 원림(留園ㆍ拙政園ㆍ獅子林ㆍ滄浪亭)과 함께 위위엔을 화동(華東)의 명원(名園)으로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명원들보다는 규모가 작아 넓이는 약 2만㎡정도다.

상하이에서 제일 번잡한 상가인 위위엔쌍창(豫園商場)에서 다리 하나를 지나면 위위엔 입구에 들어선다. 구내는 외원과 내원으로 나눠져 있는데, 그 안에 크고 작은 건물과 기암 괴석, 연못, 돌을 쌓아 만든 가산(假山) 등이 조밀조밀하게 있어 답답한 느낌을 준다. 눈에 띄는 것은 4마리의 크고 긴 용으로 이뤄진 하얀 담장이다. 용의 비늘 하나하나는 담장을 덮고 있는 기와다.

명 중기의 유명한 정원설계가였던 장난양(張南陽)이 이곳을 설계ㆍ조성할 때는 중국 조경의 특징을 다 살렸기 때문에 가장 중국적인 정원이 되었겠지만 나 같은 한국사람에게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인공적이고 작위적이고 장식적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움과 소박함으로 대표되는 한국인의 미감이나 한국미술의 특징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창덕궁 후원(비원)이나 소쇄원을 잘 알고 좋아하는 한국인의 눈에는 괴이함을 넘어 거부감까지 일으킬 수 있다.

정원 하나만 보아도 중국인의 미의식과 한국인의 미감의 차이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양쯔강 유역이 유명한 정원들, 이를테면 난징의 첨원(瞻園)이나 우쓰(無錫)의 매원(梅園), 쑤저우(蘇州)의 졸정원(拙政園), 양저우(揚州)의 개원(個園), 창저우(常州)의 근원(近園) 등을 볼 때도 그랬다.

돌도 태호석(太湖石 : 회백석의 괴석) 위주여서 식상할 때도 있다. 가산(假山)도 여기저기에 ~m 슷비슷한 것이 많아 신기함을 잃게 된다.

이런 현상과 유물은 회화ㆍ도자ㆍ공예ㆍ건축 등 중국미술의 전 분야에서 볼 수 있는데, 폄하하거나 오해해서는 안된다.

인공미를 최대한 발휘한 중국미술품은 고등예술품이고, 자연미를 그대로 살리려는 한국 미술품은 열등하다고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든 민족미술품은 저마다 독창성, 개별성, 유일성이 있으므로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고 아끼면 되는 것이다.

중국 문화유산 답사에서 마지막으로 가본 곳은 상하이의 마땅로(馬當路)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舊址: 옛터)였다. 상하이 남쪽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있었다.

여권번호와 이름까지 적고 들어가면 임시정부 청사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비디오를 봐야 한다. 안내양을 따라 1층부터 3층까지 구경한다. 1926년 12월부터 1932년 5월까지 6년간 이곳에서 활동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주요활동 모습을 사진, 문헌, 실물자료 등으로 볼 수 있다.

임시정부 국무령 김구, 한국독립당 이사장? 이동녕, 한인애국단 단원 이봉창과 윤봉길 등의 눈부신 활동상을 자세히 볼 수 있고, 60~70여년 전 애국열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가슴을 치기도 한다.

이봉창 의사의 편지, 윤봉길 의사의 선서문과 그가 지은 노래 `백범선생에게', 1932년 4월 30일 홍구공원 의거를 전한 중국 신문들의 보도 등을 읽으면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샘솟지 않으면 한국인이 아닐 것이다.

비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본 사무실, 회의실, 침실, 부엌 등은 제법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중국인 안내양의 태도가 엄숙했다. 벨기에의 건축기사가 설계ㆍ건축한 전형적인 석고문가옥(石庫門家屋: 돌로 쌓은 창고처럼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돼 보안이 철저한 집)을 안내하기에 아주 합당한 안내인 같았다.

정중하게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부채 하나를 주면서 “기념품이니 잘 간직하십시오”라고 하였다. 화학섬유천에 나염 기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 중국, 상하이'라 찍고, 건물의 바깥 모습도 찍었다. 사람은 가도 흔적은 남는다. 몸은 사라져도 혼은 남는 것이다. 위대한 혼일수록 감동적인 것이다. 우리의 애국혼은 그렇게 상하이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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