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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44)조성기 장편소설 '라하트 하헤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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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44)조성기 장편소설 '라하트 하헤렙'

입력
2000.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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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교회 태우던 불로 젊은 방황 치유되고...아직 소양댐이 생기기도 전이었다. 1972년, 7ㆍ4남북공동성명과 10월유신이 잇달아 발표돼 세상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던 시대였다. 월남전은 지긋지긋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조성기(50)씨의 장편소설 `라하트 하헤렙'(1985)은 30여년 전의 이 시기를 거쳐갔던 한 젊음의 기록이다.

하지만 시대는 달라도 이십대의 젊음에 찍히는 정신의 화인(火印), 그들이 겪는 `사막스러운 상실감'은 원죄처럼 영원히 계속된다.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는 한 젊음은 영원히 나방으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누에고치의 좁은 틀 속에 갇혀 버리고 말 것이다. `라하트 하헤렙' 은 많은 뛰어난 소설들이 그랬듯 젊음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성장의 제의(祭儀)에 관한 보고였다.

강원도 춘천시 우두동, 멀리 소양댐 쪽으로 보이는 앞산이 쇠머리(우두ㆍ 牛頭)를 닮았다 해서 이름이 붙여진 이 마을에 `라하트 하헤렙' 의 무대는 여전히 남아 있다.

육군 공병 22** 부대 정문을 끼고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부대와 시멘트블록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영외 군인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소설 속에서 젊은 영혼의 불, 광기의 불로 처참하게 타버렸던 그 교회다.

작가는 손에 자동카메라를 들고 잰 걸음으로 군인교회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대로네요, 단단한 붉은 벽돌로 교회 외벽이 바뀐 것만 빼고는…”

“문학 나부랭이 나부랭이 하지 마십시오. 육법전서보다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한 권이 훨씬 낫습니다” 라며 대어들다 식칼로 위협하는 아버지에 못 이겨 결국 법대로 진학한 문학청년인 나는 수용연대를 거쳐 이 교회에 군종병으로 배속됐다.

대학생활에서 데모꾼도 고시생도 되지 못한 나는 신앙생활에 빠지고,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만난 동역자(同役者) 정미를 짝사랑하지만 그녀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만다. 군대는 그에게 막다른 도피처이기도 했다. “이 연료탱크 곁에서 소설 속 주인공의 사수(射手)로 나오는 김 병장이 가끔 담배를 피우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사람의 인연은 참 묘한 것이다. 조씨가 `김 병장' 을 회상한 교회 뒤편의 연료탱크는 이 작품의 전반을 관통하는 불의 이미지가 결국 현실의 화재로 이어지는 도화선이었다. 김 병장은 다름 아닌 시인 정호승씨가 실제 모델이다. 담배를 피우며 “난 인생도 이 불꽃과 같다고 생각해.

죽음의 연기를 피워올리며 소멸되어 가는 과정에서 타고 있는 불꽃 말이야” 라고 말하던 시인 지망생인 그는 조씨의 사수로 잠시 군생활을 함께 했다. 당시 조씨가 그의 노트에서 훔쳐봤던 시구 `저 봄물에 너를 풀어/ 내 영혼의 화폭에/ 에밀레 종과 같이/ 사랑일레/ 사랑일레/ 울음 우는/ 진초록 그림을 그리고 싶어라' 에 나오는 `저 봄물' 은 교회 뒤편을 흐르는 소양강의 지류이다.

나에게 또 다른 불꽃의 의미를 알려준 이는 군목(軍牧)이었다. 전방에서 사고로 교회와 병기고까지 불태운 만년 소령, 월남전의 화인까지 입은 그는 불에 대한 `불안마귀' 가 들려 새벽마다 나의 잠을 깨워 불단속을 하며 괴롭힌다.

봄물이 흐르는 강변의 둑길과 함께 군인교회 바로 곁에 자리한 잠종장은 이런 불길들을 피할 수 있는 주인공의 안식처이자 사색의 장소였다.

잠종장에는 초록을 흩뿌려 놓은듯 뽕잎이 무성하다. “잠종장을 보며 당시 나는 과연 나방으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누에고치 속에 영원히 갇혀버리고 말 것인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 작가는 고백했다. `누에들은 한잠을 잘 때마다 한 살씩 나이를 먹으며 변신을 거듭한다.

그러나 한참 누에나방으로서의 비상을 기다릴 때 인간들이 고치를 따서 수견(收繭)을 함으로써 굳은 번데기 그대로 남게 된다' 며 소설의 주인공은 `어딘가에서 내 인생에 대해서도 수견작업이 행해지고 있는 것 같은 불안' 을 느낀다.

주인공의 갈등과 불안은 부대 조각실에서 근무하는 미대 출신의 성 이병과, 무용과 출신의 정신이상 여인 동순을 통해 마침내 현실의 `불' 로 구체화된다.

처먹는 귀신, 교회 다니는 귀신, 정욕귀신 등 일곱 가지의 귀신에 들렸다는 동순과 나는 육체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녀가 추는 지노귀굿(指路鬼ㆍ죽은 자의 영혼이 저승길을 안전하게 가도록 인도하는 굿) 은 나에게는 또 하나의 통과의례로 비친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조각실에 붙은 불길 속에서 나는 화재의 부작위범이 되어, 새발심지를 태우는 무당의 모습으로 춤추는 동순을 보며 젊음을 열병처럼 들끓게 했던 모든 것들에 허망함을 느낀다.

“나의 시간, 재능, 애정, 문학에 대한 꿈, 고시공부, 친구들, 가족들…아! 그것은 정말 광기어린 허비의 세월이었다. 그 허비의 밑바닥에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예수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절망감이 아담? 고 무엇인가. 아니, 나 같은 존재는 감히 예수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자멸감이 아니고 무엇인가.”

모든 것을 태워버린 화재의 끝, 제대하는 주인공에게 성 상병이 건네주는 조각품의 이름이 바로 소설의 제목 `라하트 하헤렙' 이다. `칼 모양으로 된 불길', 성경 창세기에 `화염검(火焰劍)' 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이다. `하나님이 에덴동산 동편에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게' 한 그 칼이다.

조씨는 “순수영혼을 잃은 인간들이 에덴으로 되돌아오기 위해서는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는 것이 라하트 하헤렙의 의미라고 말했다. 그것은 영혼에 입은 화상을 통해야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젊은이들의 칼이다.

소설 속의 불은 아버지의 권위와 기존 교회의 기성체제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신으로부터 불을 훔쳐내온 프로메테우스 적인 불이자, 우주는 물 불 공기 흙이라는 4원소로 이루어졌으며 세계는 정화의 과정이라는 것을 실증하기 위해 스스로 화산으로 뛰어내린 엠페도클레스적인 불이다. 초월과 세속 사이에서 인간 본연의 초상을 찾아 방황하는 자의 상징이다.

조씨는 이 소설을 제대 후 한참을 지나 썼다. 입학 후 10년 만에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그는 서울대 앞 신림동의 이른바 `녹두거리' 에서 대학생 선교단체의 지도자로 남았다. 당시 그의 월 수입은 10만원, 시내버스 여승무원의 월급이 15만원이었다.

분열하는 교회를 보며 스스로의 생에 대해 다시 갈등하던 그는 꼬박 한 달 밤낮을 고시원에서 새워 `오늘의 작가상' 응모작으로 `라하트 하헤렙' 을 완성했다. 신춘문예로 등단했지만 거의 작품 발표를 하지 않았던 조씨가 15년 만에 재데뷔한 작품이었고 그를 소설 속의 `나' 처럼 정화의 불길을 통해 `우리 시대의 소설가' 로 재삼 거듭나게 한 소설이었다.

조씨는 “이 군인교회에서나, `라하트 하헤렙' 을 쓸 때나, 그리고 다시 젊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금이나 나를 사로잡고 있는 질문은 언제나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네가 지금 있어야 할 곳에 있느냐?'라는 성경 창세기 3장 9절의 질문” 이라고 말했다.

춘천= 글ㆍ하종오기자 joha@hk.co.kr

줄거리

고교 때 문학병을 앓았던 나는 식칼을 들이대는 아버지의 강요로 법대에 진학한다. 캠퍼스를 뒤덮는 최루탄 연기 속에서 사회변혁을 외치는 갈등론자도 공부에 전념하는 구조기능론자도 아닌, 신앙생활에 몰두하는 `내부갈등론자' 가 된 나는 대학생 선교단체의 정미를 짝사랑한다.

하지만 정미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나는 입대한다. 영외 군인교회의 군종사병으로 복무하게 된 나는 군목의 화재(火災) 콤플렉스가 그의 월남전과 전방에서의 실제 경험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달리를 좋아하는 조각실의 성일병과 가까워지고 교회에 드나드는 무용학과 출신의 정신병자 동순과는 육체관계를 갖게 된다.

군 생활을 통해 신앙과 현실, 이상과 젊음의 고통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는 휴가 때 정미가 미국유학 중 정신이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귀대한다. 우연히 목격한 영내 화재현장, 나는 불길을 잡지 않고 불이 군인교회로까지 옮겨 붙는 것을 바라본다.

화재로 동순은 얼굴에 화상을 입는 대신 정신병이 낫는다. 비슷한 시기에 정미도 병이 나아 고시합격생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제대하는 날 나는 성 상병으로부터 `라하트 하헤렙' 이라는, 불의 이미지와 칼의 이미지를 결합한 조각을 선물받는다.

조성기 연보

▦ 1950년 경남 고성 출생

▦ 서울대 법학과(1977년), 장로회 신학대학원(1986년) 졸업

▦ 1971년 `만화경'이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 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

▦ 오늘의 작가상(1985년) 기독교문화상(1986년) 이상문학상(1991년) 수상

▦ 창작집 `라하트 하헤렙' `통도사 가는 길' `우리 시대의 사랑', 장편소설 `야훼의 밤' `욕망의 오감도' `홍루몽', 신앙론집 `십일조를 위하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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