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가족들과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흥미롭게 봤다.한 밤 중 북한측 초소에서 남북한 병사들이 몰래 만나 신뢰를 쌓고 우정을 나누는 장면은 나와 현대 대북사업팀이 경협사업 초기 중국 베이징과 평양에서 극비리에 북측 파트너들과 만날 때와 꼭 닮았다.
영화속 병사의 조심스러움과 가슴떨림이 당시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협상파트너들과 마주할때 우리가 느꼈던 설레는 심정과 같았으리라.
1998년 2월부터 시작된 그들과의 대화는 베이징 시내 호텔과 식당, 찻집을 오가며 영화처럼 소곤소곤 진행됐다. 처음엔 서로가 서먹서먹했고 말조차 잘 통하지 않았다.
열흘 밤낮을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눴지만 우리 제안을 상대편이 믿지 않고 그들의 말을 우리가 의심해 공통분모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면 같은 민족이고 같은 일을 하겠다는 사라들이 이렇게 생각이 다르고 언어가 다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확실한 답변을 요구하며 "보장서를 써달라"고 하면 그쪽은 "성과적으로 예건한다"는 말을 쓴다.
알고보면 '담보한다'는 뜻으로 결과에는 차이가 없어도 사용하는 언어는 차라리 영어를 통역하는게 더 속시원할 만큼 달랐다.
하지만 6개월 가량 서로 부대끼다 보니 양쪽 모두 꼭 협상에 성공해야 한다는 컨센서스가 싹트기 시작했다. 덜주고 더 받는 상거래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신회를 쌓아가는 영화 속 병사처럼 된 것이다.
베이징 시내 한 음식점에서 협상을 하다가 깨지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다른 데로 가자, 다음엔 이 집에 오지 말자"고 할 정도로 죽이 맞았다.
상대를 더 배려하고 협조해주다 보니 오히려 북한 대표와 우리 실무팀이 북측과 현대 본사로부터 오해를 받을 정도였다.
전세기를 타고 오후 5시에 평양에 들어갔다가 잠 한 숨 자지 못하고 밤새 협상을 하다 다음날 아침 7시 비행기로 나올때는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를 건너 돌아오는 영화 속 병사처럼 흥분됐다.
우리 협상팀의 불문율은 5가지. 흰 와이셔츠를 입을 것. 의자에 지긋이 뒤로 기대 앉지 말 것. 웃지 말것, 뻔한 답변이 나올 것 같은 질문은 하지 말 것. 그리고 기록을 꼭 남기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신뢰를 주고 적극성을 보이기 위해 정주영 명예회장이 만든 일종의 에티켓이다.
그들과 첫 악수를 나눈지 2년. 지금은 눈빛만 봐도 서로를 알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술자리에선 서로의 별명도 부른다. 올 8월, 잠시 몸이 아파 서울 중앙병원에 입원해있을때 어떻게 알았는지 북한 실무팀 파트너 중 한 사람이 쾌유를 빌며 인편에 꽃다발까지 보냈다.
코끝이 찡했다. 북한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정이 많다. 표면적으로는 냉정하지만 이면에는 정감이 넘친다. 서두르지 말고 잦은 접촉을 통해 이해하고 신뢰를 쌓으면 다양한 분야에서 남북이 어깨동무를 할수 있을 것이다.
김고중 현대아산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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