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관계의 급진전은 6ㆍ15 남북 공동선언이 가져온 한반도 안보 역학 관계의 변화에 새로운 역동성을 부여하고 있다. 북미가 50년간의 적대 관계 청산을 선언하고 최고 지도자간 대화를 통해 관계정상화의 길을 모색키로 한 것은 북미의 대립 구도 아래 설정된 동북아의 역학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바꿀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우선 남북 정상회담에 이은 북미 회담의 성공적 결과는 북한과 일본과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향후 북미 관계의 정상화 과정에서 북한의 핵ㆍ미사일 개발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는 노력은 필연적으로 예상되는 수순이다. 미국과 북한이 단기간 내 그 해법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양측의 대화가 지속되는 상황은 일본에 대북 관계를 개선하는 데 놓인 두 가지 걸림돌(핵ㆍ미사일, 납치문제) 중 하나를 제거할 수 있는 유리한 기반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일본 총리가 13일 주롱지(朱鎔基) 중국 총리와 회담한 뒤 “중국과 함께 북미간 긴장 완화 움직임을 계속 지원할 것” 이라고 말한 점은 이러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경제 성장을 시급한 과제로 내세우고 있는 중국과 러4?시아로서는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의 진전으로 더욱 공고해지고 있는 한반도의 안정 구도는 일단 환영할 만한 상황이다. 한 외교 전문가는 “북미간의 안보 대화는 동북아의 평화 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위험 요소의 제거를 의미한다”며 “이러한 환경이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 노력에 대한 `국제적 추인'을 가속화하는 촉매제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북미 관계 진전에 대한 한반도 주변국의 시각이 오로지 긍정적인 것 만은 아니다. 동북아에서 미국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려는 중국과 러시아에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방북은 남한 뿐 아니라 북한까지 미국의 영향권 안에 끌어넣기 위한 공세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다. 이런 상황은 중국과 러시아의 반작용을 유발함으로써 한반도 정세의 긴장 요인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
중국 장쩌민(江澤民) 국가 주석이 북한 조명록(趙明祿)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의 방미 기간 중인 지난 9일 전격적으로 주중 북한 대사관을 방문한 것은 북한과의 교감 아래 미국의 일방적 독주를 견제하겠다는 계산도 없지 않은 것으로 것으로 분석된다.
이 같은 역학구도는 향후 한반도를 매개로 한 4강 간의 `견제와 균형'이 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이 점에서 朱 총리의 17일 방한, 클린턴 대통령의 연내 방북, 내년 초로 예상되는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러시아 답방, 江 주석 또는 리펑(李鵬) 전인대 상무위원장의 방북 등 정상 외교를 통해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려는 4강의 각축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김승일기자 ksi8101@hk.co.kr
■공동성명으로 시작된 북미관계의 급물살로 올 남북관계는 미시적인 조정국면을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남북관계의 숨고르기는 퇴행적 성격이 아닌 북미관계 진전과 내년 봄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방한을 위한 준비적 성격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통일부 당국자는 15일 “이달 하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으로 숨가쁘게 진행될 북미관계로 남북간의 일정은 조정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당국자들은 또 이달 18일 평양에서 진행될 남북경협 2차 실무접촉, 15명 규모의 북한 경제시찰단 방한 등도 조정될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다. 북미간 경제시찰단 교환의 경우 이달중 남측으로 올 경제시찰단과 함수관계에 놓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은 적어도 보름 이상 늦춰질 것으로 보인다. 당초 예정대로 이달 3일께 명단을 교환해 생사 확인작업이 이미 개시됐어도 빠듯한데 북한 노동당 창당행사 등으로 차일피일 연기되고 있어 물리적으로 예정일을 지킬 수 없는 형편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한반도의 제도적 평화를 위한 평화협정 문제로까지 확산되는 현 국면의 특성상 남북간, 북미간의 긴밀하고도 빈번한 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될 상황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서동만(徐東晩)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l4?dquo;북한은 `페리 프로세스'에 따라 북미대표부 개설 수준으로 북미관계를 진척시키려 하고 있다”며 “북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틀에서 변화를 모색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내년 봄 김 국방위원장의 방한에서 언급될 평화협정 문제 등을 둘러싼 남북의 입장이 조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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