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동(石童) 윤석중(尹石重)씨의 창작 무대는 어디인가. 그를 만나러 가면서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1,000여 편에 이르는 그의 동시ㆍ동요 창작에 영감을 준 장소적 요인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한반도에 사는 모든 어린이들의 가슴, 바로 마음밭이 아닐까, 그의 시들은 동심(童心)이라는 텃밭에서 나와서 다시 그 밭으로 돌아가 거름이 되는 알곡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윤씨는 올해 우리 나이로 아흔이다. 우리의 동시와 동요를 생각할 때 그는 `살아있는 역사'라는 수식이 조금도 과장이 아닌 생을 살아왔다. 우리 현대사의 어린이 노래는 그에게서 비로소 시작됐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라는 졸업식 노래를 부르고 자란 이 땅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아들딸을 낳아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를 불러주며 키웠다. 그 아들딸들은 윤씨가 만든 `어린이날 노래'의 새와 냇물처럼 푸른 하늘과 푸른 벌판을 날고 달리며, 자라서 또 다시 아들딸을 낳아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같은 노래로 그들을 키울 것이다.
27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출퇴근하며 `새싹회' 사무실에서 시작하던 그의 일~? 에는 8월 변화가 생겼다. 서울역 앞 대우재단빌딩에 있던 사무실을 대우 사태의 여파로 비워줘야 했던 것이다. 이후 그는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여전히 책을 읽고 동시를 쓰며 지내고 있다. 경기 부평의 `성모자애병원'에 있는 동시인 황베드로 수녀가 사무실을 그쪽으로 옮기시라고 하지만 준비가 만만치는 않다.
보청기를 사용해야 하는 것 이외에는 돋보기를 쓰지 않아도 책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운동이요? 나야 어린이 운동 해서 건강하지요.” 사람은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지만 그의 얼굴이야말로 그가 쓴 노랫말 만큼이나 맑아보인다.
지난 2일 그의 아호를 따서 후진들이 만든 석동문학회(회장 어효선)는 그의 아흔을 기념해 기념문집 `내일도 부르는 노래'를 만들었다. 이 책에는 그가 자선한 동시 7편이 실려있다. 그는 스스로 제일 좋아하는 자신의 동시를 한 편 꼽아달라는 주문에 `먼 길'을 펼쳐 보여주었다.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가려고/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 자고'(
전문)
아직 말을 배우지 못한 것은 물론 걸음마도 제대로 떼지 못하는 아기의 순수한 영혼, 그 영혼을 바라보는 아빠의 마음, 핏줄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그 마음과 마음의 교류를 이처럼 짧은 시구에, 이토록 명료하게 드러낸 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배경에는 그의 젊은 날과 우리 현대사의 상처가 압축해 자리잡고 있다.
“큰 아들이 아마 두 살(1939년) 때였지요. 당시는 일제 말기라 징용 가면 누구나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기 힘든 때였슐? 니다. 징용 통지를 받고, 보따리를 싸놓고,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재우려 하는데 아이는 잠 들지 못하고 자꾸 내 얼굴을 쳐다보는 거에요.” 말똥말똥한 눈망울로 아빠의 얼굴을 들여다는 아기의 모습을 담은 재미있는 발상의 시로 보이는 `먼 길'이 실은 그에게는 기막힌 사연의 시였던 것이다. 그는 `먼 길'을 쓰면서 “이 시가 내 마지막 동요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도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것이다. 스물여덟살을 전후해 일본 유학에서의 귀국길에 부산-서울을 완행열차로 오가면서 실제 그는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서 배를 드러내놓고 잘도 자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본다. “이렇게 세상이 시끄럽고 어수선한데 그래도 아이들은 시끄러운 세상에서 옥수수 커가듯이 잘 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제하 민족의 암울한 현실, 그러나 거기서 발견한 희망으로서의 동심이 바로 그의 문학의 원천이었다. 그 희망은 해방 후 `졸업식 노래'와 `어린이날 노래'에서도 드러난다. “해방 후에도 우리 학생들은 졸업식에서 `반딧불'이란 일본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당시 문교부 편수관이 최현배씨의 부탁을 듣고 찾아와 우리말 노래를 하나 지어달라고 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읊어보았지요.”
그의 회고는 자연스럽게 요즘의 세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방송을 들어보세요. 어린이 시간에 어린이 노래가 나옵니까. 동요를 틀면 스폰서가 붙지 않는다고 유행가나 틀고있습니다.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도 동요를 부르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합니다. 어릴 적부터 어른 흉내나 내고. 이러니 갈수록 어린이 시 짓기조차도 힘듭~m 다. 아이들의 동심을 해방시켜 주어야지요. 또 해방 이전에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이 일본 노래를 불렀다 하더라도, 지금은 우리말도 채 배우지 못한 아이들에게 영어 노래를 가르치고 있지요? 해방 후 `졸업식 노래'를 만들었는데 한동안 학생들이 졸업식장에서 그 노래를 불러도 30여년간 우리말을 뺏겼던 터라 아이들의 혀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13살 때부터 동시를 써온 그는 요즘도 동시를 쓴다. 그가 처음 쓴 동시는 `봄'이었다. 서울 수표동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그는 교동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그때 일본 창가 `하루(春)'를 배우면서 그는 “우리나라에도 버젓한 봄이 있는데 왜 일본노래를 부르지” 하는 생각에 `봄'이라는 동요를 지어 `신소년'지에 투고, 입선했다. 1933년 나온 그의 첫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는 한국 최초의 동시집으로 비로소 우리 아동문학을 정립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77년간 이어져온 동시 짓기다. “갈수록 한 편 쓰기가 더 조심스러워진다”는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애국가'를 쉬운 우리말로 풀어 쓰는 것이다. 최근 그가 완성한 `나라사랑노래'는 이렇게 이어진다. “어제 없는 오늘이 어디 있으며 오늘 없는 내일이 어디 있으랴…. 안마르는 동해물 푸른 그 물결 닳지 않는 백두산 옛날 그 모습.” 그는 이 노랫말에 작곡가 김동진씨가 곡을 붙여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노랫말'이란 우리말도 그가 만든 말이다. 아무개 사(詐) 아무개 곡(曲)이라고 한자로 쓰니까 꼭 누가 죽어 곡하는 소리로 들리더라는 것이다. `시비(詩碑)'라는 단어도 그는 “시비(是非)하는 것같이 들릴 수도 있어” 노래~? 라는 말로 바꾸었다. `반달'과 `새 나라의 어린이'를 새긴 그의 노래비는 지금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서 있다. 이곳은 `노래 마당'이라 이름 붙여져 지금도 후진들과 각종 사회단체 주최의 동요 모임과 글짓기 대회가 벌어진다.
“이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새싹의 집'을 만드는 것입니다. 새싹회 사무실도 없어지고…. 서울 근교의 땅에 오막살이라도 좋으니 어린이를 위한 터전을 하나 만들었으면 하는 것이 남은 꿈이요.”
그는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키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린이말이 살아있어야 한다”며 말을 맺었다.
■먼 길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아빠는 머리 맡에 앉아 계시고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고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 자고
산바람 강바람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서늘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준대요
강가에서 부는 바람, 시운한 바람
그 바람도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사공이 노를 젓다 잠이 들어도
저 혼자 나룻배를 저어 간대요
초생달
비가
연잎을 적시려고
애를 쓰지요
연잎은 연잎은
젖지 않고
구슬을 만들어
대굴대굴 굴리지요.
▩ 연보
▦1911년 서울 출생
▦1924년 `신소년'지에 동요 `봄' 입선
▦1933년 국내 첫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 출간
▦1942년 일본 조지(上智)대학 신문학과 졸업
▦1956년 `새싹회' 창립
▦1986년 예술원 원로회원
▦1988년 `새싹의 벗 윤석중 전집' 30권 간행
▦ 3ㆍ1문화상(1961) 외솔상(1973) 막사이사이상(1978) 예술원상(1989) 인촌상(1992) 등 수상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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