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에 경기고등학교가 옮겨갈 삼성동 캠퍼스를 설계하면서 인접한 봉은사라는 절에 처음 가 보게 되었다.젊은 건축가 지망생이었던 나는 모교(母校)를 설계한다는 일에 상당히 들떠 있었는데 학교 예정지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이 절의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가 좋아서 갈 때마다 절을 함께 들려보곤 했다. 처음에 내가 눈여겨 본 것은 대웅전이라고 쓴 현판이었고 다음이 그 옆의 판전(板殿)이었다.
이곳은 경판(經板)을 보존하는 전각이고 그 옆에 역경원(譯經院)이 있는데 듣기로는 봉은사의 역경사업은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것이어서 이 절이 한 때는 승가학문의 대요람이었다는 이야기가 실감날 만큼 조용하고 공부하는 분위기였다.
'판전'이라는 횡액(橫額)의 낙관은 '칠십노과병중작(七十老果病中作)'이라고 되어 있어서 추사(秋史)의 글씨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저 추사가 칠십 이후에는 노과(老果)라고 낙관한 것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추사인가보다라고만 생각하고 무심히 보았다.
추사의 글씨는 그 명성에 비해 그게 정말 잘 쓴 글씨인지 너무도 감상하기 어려워서 처음에 그렇게 무심히 보았던 것이다. 얼마 후인가 최완수선생의 '추사명품첩 해설'과 이흥우선생의 이에 관한 글을 읽고 나서야 그 글씨가 그렇게 보아 넘길 것이 아니었음을 알고 나의 무지를 부끄러워하였다.
75년에 한국종합전시장(KOEX)을 설계하게 되어서 다시 또 길 건너편의 봉은사를 틈날 때마다 들르게 되었다. 이제서야 '판전'을 다시 보고, 또 보고, 오랜 시간 그 근처를 서성거리면서 추사가 이 외딴 절에 어떤 연유로 관계를 맺게 되었을까 궁금하기도 했었다.
내가 아는 추사의 일생은 학문에 있어서는 중국의 대가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은 대성공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핍박과 굴욕으로 점철된 암울한 생애였고 따라서 사회 생활, 가정 생활은 파란과 파탄의 연속이었다.
그 전에 가본 온양의 추사 생가(古宅)는 그의 지체 높은 출신을 보여주듯 당당한 곳에 위엄 있게 서 있었으나 제주에서 귀양살이 십년을 보내면서 손수 지었다는 함덕(咸德)의 연북정(戀北亭)은 쓸쓸하기 그지없는 바닷가에 외롭고 처량하게 서 있어서 그 생애 전반과 후반의 대비를 건물들이 보여 주는 듯하였다. 그러다 말년에 유배가 완화되어 과천에서 노후를 보냈다고만 알고 있던 터이다.
'판전'글씨는 학고재에 의하면 추사가 운명하기 얼마 전의 소위 절필(絶筆)이라고 하는데 특히 본인 스스로 병중작이라고 밝힌 예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 절필설에 걸맞게 노쇄와 병고에 시달리는 한 노인의 마지막 안간힘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에게 가장 감동적인 것은 그 대학자의, 높은 예술가의 필생(畢生)의 결론이 그 단 두 글자에 응축, 집약되었다고 본다면 아무리 병중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필력과 운필이 가물가물했다 해도 그것은 그의 총체적 결론이고, 그 결론은 한마디로 평범하다 못해 치졸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동자체(童子體)가 되는 셈이다.
만일 그가 정말 '중병'을 '병중'정도로 겸양하면서 글씨가 잘 안되었음을 안타깝게 변명하고 있다 하여도, 그래도 노대가가 마지막 도달한 예술의 최고·최종의 경지는 어린이처럼 순진무구함으로 돌아갔다는 그 일이 충격적이다. 동자체는 이제 갓 천자문을 끝낸 어린이가 쓴 글씨처럼 단순치졸하고 무심투명하다. 재주를 자랑하지 않음이 마치 아무 재주가 없는 듯하고 자신을 버림이 마치 세상 도리를 모두 깨달은 듯하다.
오늘 피치 못할 결혼식 때문에 근처 예식장에 갔다가 우중에 혼자 판전을 다시 찾았다. 오랜만에 보는 절 주변은 고층건물이 가득한 도심지로 변해 있고 경내는 큰 불사(佛事)를 벌이는 듯 몽땅 파헤쳐져 옛날 가라앉은 분위기는 간데없이 분주하기만 한데 '판전'은 구석으로 밀려나 겨우 찾아보아야 찾을 정도였다. 액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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