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태풍 영향권에 들어 있었다. 물만골에서 부전시장을 거쳐 자갈치로 가는 시내 유일의 간선도로가 비바람에 완전히 마비됐다.버스 정거장 한 구간을 가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고 교통방송이 떠들어댄다. 비단 부산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어설픈 도시문명이 빚어내는 참혹한 모습이다.
힘들여 도착한 자갈치 난전에 널린 돼지머리, 좌판의 고래고기, 물비린내 나는 생선들은 그러나 태풍에 날아가 버릴듯 펄럭대는 비닐 포장천막 아래에서 빗방울을 뒤집어쓴 채 문명을 비웃듯 '히죽이 웃고 있다'.
시인 최영철(崔泳喆ㆍ44)씨는 이 히죽이 웃는 돼지 머리에서 야성(野性)을 노래한 적이 있다.
('야성은 빛나다' 부분).
최씨는 부산 시인이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네 살 때부터 부산에서 살아왔다. 부산은 그에게 삶과 시의 중심이면서 또한 변방이다.
시장바닥에 풀린 야성의 고향이기도 하다. "중심이 되지도 못하고 중심 근처에서 오래 서성이다가 나는 눈이 멀었다.
중심에서는 중심을 볼 수 없다. 중심은 중심을 깔고 앉은 꼴이어서 본질을 더듬지 못한다. 마냥 헛다리를 짚으며 남의 다리나 긁을 뿐이다."
스스로 변방의 목소리가 되기를 자처한 시인 최씨는 변방 '卒(졸)' 들의 슬픔과 절망, '졸의 힘'을 묶어 그들 삶의 끈적거림과 전율을 드러낸다. "문학이란 원래 비껴서 보는 것이 아닐까요" 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가 가진 희망은 거짓일 수 있으나, 이곳 사람들의 희망은 진짜입니다. 절실하니까요. 세파에 깎이고 깎인 그들의 희망은 관념적 희망이 아닙니다."
그 희망을 보기 위해 그는 자주 물만골로 간다. 부산 도심의 황령산 산자락에 위치한 물만골은 도시 서민의 무허가 주택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30여년 전부터 하나 둘 시멘트 벽돌을 그대로 드러낸 채 슬레이트로 지붕만을 얹은 무허가 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치면 그날로 없어졌다가도 바로 다음날이면 다시 새 집들이 지어지는 곳, 최씨는 이곳을 '진짜 희망이 움트는 막장' 이라고 표현했다.
물만골 약수터에 오르면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그는 '일광욕하는 가구'를 썼다.
그가 물만골에서 본 것은 바로 '음지의 근육'이었다. 이 근육을 통해 그는 중심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변방만이 가진 희망을 본다.
물만골을 노래한 다른 시 '박새'에서 이 희망은 한결 밝은 표정으로 드러난다.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중앙문단에 나오기 전부터 최씨는 부산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시인이었다. 고교시절부터 '학원'에 투고했던 문학소년은 '시와 인간' '지평' 등 부산의 문학지들에서 이미 필명을 날리고 있었다.
등단 후인 87년부터 3년여 최씨는 계간지 '외국문학' '문학정신'의 편집장으로 일하며 서울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중심에서의 시간을 문학으로나 생활로나 견뎌낼 수 없었다.
('그 마을' 부분) 를 그는 그리워했고, 다시 부산으로 왔다.
읽는 이의 심장을 부글부글 들쑤시는 시 '이 독성 이 아귀다툼'에서처럼 '한 번도 세상에 대가리 쳐든 적 없는', 안경 너머로 깊은 눈빛을 감춘채 늘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그이지만 변두리의 문학적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그의 어조는 높아진다.
"중심부의 문학은 대체로 가볍고 얇아져서 진지한 질문이 조롱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죽겠다고 악쓰는 소리와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다시 자리 털고 일어서는 인생들이 즐비한 곳, 바로 우리마을 골목길이 내 시의 고향입니다."
부산의 250여 시인, 600여 명의 문인들은 그와 함께 중심부 문학의 문제를 상쇄하고 치유할 대안을 모색하는 동료들이다.
그 변두리에서 발견한 생명을 최씨는 결코 미사여구로 꾸미거나 현자(賢子)의 포즈를 취하거나 논리적 포장을 두르지 않고 자신의 몸 전체로, 따스한 눈길로 포착한다.
그의 시의 대부분은 이른바 '일상시' 라 불릴 수 있는 평범한 일상과 사물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흔히 일상시들이 빠지기 쉬운 중산층 의식의 함정을 그는 변두리 삶을 향한 따뜻한 시선으로 벗어난다.
다대포 앞바다에 버려진 폐선에서 그는 갯쑥부쟁이의 희망을 본다.
('폐선' 부분)
소설을 쓰는 부인 조명숙(趙明淑ㆍ42)씨와 방 2개짜리 집에서 아들딸을 키우며 사는 최씨는 3년 전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퍽치기를 당했다.
한나절 뇌수술까지 하는 중상을 입고 깨어나 시집 '일광욕하는 가구' 에 실린 시들을 썼다. 그 전부터 삶을 이어가기 위해 부인과 안 해본 일 없을 정도로 거친 인생을 살아오면서도 그는 갯가 폐선에 뿌리를 내리는 쑥부쟁이 같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뿌리' 라는 절창에서 그가 말했듯 '흙빛으로 천 갈래 만 갈래 속이' 타면서도 그는 세상의 허섭스레기를 위해 시를 쓰는 문학의 끈을 놓지 않았다.
'21세기 임명장' 에서 그는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시간과 지켜나가야 할 생명에 대해 이런 바람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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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독성 이 아귀다툼
우울한 실직의 나날 보양하려고
부전시장 활어 코너에서 산 민물장어
건져놓고 주인과 천 원 때문에 실랑이하는 동안
녀석은 몇 번이나 몸을 날려 바닥을 포복했다
집이 가까워올수록 제 마지막을 알았는지
비닐 봉지 뚫고 새처럼 파닥였다
물 없는 바닥을 휘저으며
날자 날아오르자고
참기름 들끓는 냄비에서
꼿꼿이 고개 들고 나를 본다
한 번도 세상에 대가리 쳐든 적 없는 나를
두고 보자 두고 보자고
식도를 구불구불 심장을 쿵쿵
위장을 부글부글 들쑤시고 간다
이 독성 이 아귀다툼 나를 새롭게 할 것이야
마디마디 박히는
민물장어 부스러진 뼈의 원한
힘이 솟는다
다 부서지면 나는 날아오를 것이야
뿌리
- 푸조나무 아래
이 푸른 잎을
제 진심이라 생각지 마시고
이 늘어진 가지를
제 기쁨이라 생각지 마소서
그대 눈에 마냥 푸른빛 보이려고
그대 마음에
마냥 우거진 행복만을 비추려고
이렇게 흙빛으로
천 갈래 만 갈래 속이 탔습니다
최영철 연보
▦1956년 경남 창영 출생
▦1978년 경동공전 졸업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1987)
'가족사진'(1991)
'홀로 가는 맹인 악사'(1994) '야성은 빛나다'(1997)
'일광욕하는 가구'(2000)
▦제2회 백석문학상 수상(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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