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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논리가 자율성 침범…문화는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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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논리가 자율성 침범…문화는 위기"

입력
2000.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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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부터 28일까지 대산문화재단의 주최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릴 2000 서울국제문학포럼의 외국인 참가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일 것이다.'상속자' '재생산' '구별짓기' '말하는 것의 의미' '예술의 규율' 등 거의 스무 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들은 부르디외를 현재 세계 인문사회과학계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이름으로 만들고 있다.

1930년 프랑스의 남서부 베아른에서 태어난 부르디외는 현재 콜레주 드 프랑스와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흔히 발생론적 구조주의라고 불리는 그의 이론은 구조와 주체를 동시에 고려하는 유연함에다 방대한 통계 처리를 통한 과학적 엄밀함을 겸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는 일생동안 어떤 정당에도 가입한 적이 없지만 줄곧 좌파적 입장을 견지해 왔고, 특히 90년대 들어 미국의 주도로 '세계화' 담론이 퍼지기 시작한 뒤로는, 경제 논리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문화의 자율성을 옹호하며 '기득권 좌파' 가 아닌 '좌파의 좌파' 를 이끌고 있다.

25일 내한할 '사회학의 거목' 부르디외 교수와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문화와 세계화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았다.

- 이번 한국 방문은 선생님의 첫 방한입니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어떠세요?

-한국이라는 말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은 손에 쉬이 잡히지 않고 일관성이 없어서, 그것들을 몇 마디 말에 담기는 쉽지가 않아요.

내가 사진이나 영화에서 본, 그리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 라는 명성이 드러내는 매우 아름다운 경치들, 오래도록 억압받으며 수세기 동안 침략과 분단을 겪었지만 모든 형태의 지배에 맞서서 강한 자존심과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던 어떤 민족의 역사적 초상, 그런 것들이지요.

나는 특히 지식인들과 학생들의 최근의 저항 운동을 생각합니다.

- 선생님은 문학 포럼에 초대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포럼에 초대된 유일한 사회학자입니다. 한국에서는 사회학계보다 문학비평계에 선생님이 먼저 소개되기도 했지요.

사회학자라는 직업 외에 선생님을 문학 이론가라고도 느끼십니까?

-나는 '예술의 규율' 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는데 그 책은 한국어를 포함해서 모든 유력한 언어들로 번역이 됐습니다.

이 책은 서울 포럼에서 토론될 주제들의 중심이 될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어요. 예컨대 경제적 정치적 권력에 대한 문학적ㆍ예술적 생산의 장(場: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어떤 사회적 관계들의 덩어리)의 자율성이라든지, 이 장의 구조 안에서 서로 다른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차지하는 위치와 그들이 생산해내는 작품의 '유형' 사이의 관계라든지 하는 것이지요.

나는 내가 이 문학 포럼에 다소 걸맞지 않는 인물로 비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그 곳이 내가 정확히 있어야 할 자리라는 걸 느낍니다.

포럼에 초대된 작가들 대부분을 내가 오래 전부터 읽어왔고, 또 그들 가운데 몇은 내가 개인적으로 안다는 사실 때문에 더 그렇지요.

예컨대 자크 루보는 몇 년 전에 내 제의로 사회과학 고등연구학교의 교수가 됐고, 월 소잉카는 나와 함께 국제 작가회의에 참가해 왔지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사회학과 문학 사이의 일종의 이율배반이라는, 널리 퍼져 있는 선입견에서 당신이 벗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 사람들은 흔히 선생님을 자유화 시대에 대한 '위대한 경멸자' 라고 부릅니다.그래서 선생님은 때로 문화적 보호주의의 주장자로 비쳐지기도 합니다.

이 문화적 보호주의는 선생님이 이번 포럼의 발제문 '문화는 위험에 처해 있다' 에서 주장하시는 문화적 국제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 것입니까?

-'문화적 보호주의' 라는 표현은 전혀 부적절합니다. 당신은 무역의 논리에서 빌려온 개념을 문화의 영역으로 옮겨놓고 있어요.

그럼으로써 한 민족 문화를 다른 민족문화로부터 '보호하는 ' 것이 문제라는 가정을 하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내가 옹호하는 것은 그 정반대에요.

게다가 나는 이 영역에서 어떤 관세 장벽들이 가능한지도 상상할 수 없어요. 문제가 되는 것은 문학적 장이 기능할 수 있는 조건들을 보호하는 것이지요.

그 문학적 장은, 내가 '예술의 규율' 에서 보여주었듯이,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권력에 대한 자율을 매우 느리게 획득해왔고, 지금 그런 권력들이 다시 이 문학적 장을 위협하고 있어요.

상업과 상업적 논리의 영향은 오늘날 문화적 생산의 장의 자율성을 위협하고 있는데, 이 자율성은 가장 선진적인 문학 연구의 필요조건이란 말입니다.

그건 문학 이외의 예술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고, 영화에서는 더 그렇죠. 바로 이런 자율성이야말로, 민족적 전통들과 연결된 차이들을 넘어서서, 파스칼 카자노바가 자율적 작가 예술가들의 '탈민족적 인터내셔널' 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고, 적어도 내가 바라기로는, 시장의 요구조건들이 예술과 문학에 가하는 위협에 맞서서 그들이 온 마음으로 옹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 같은 발제문에서, 선생님은 조예가 있는 생산자ㆍ비평가ㆍ수용자들로 구성되는 소우주를 바람직한 문화의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이런 입장은 '문화국가' 라는 책에서 현재의 '문화' 라는 것 대신에 과거의 '프랑스 정신' 을 찬미했던 마르크 퓌마롤리의 문화적 엘리티즘과 명확히 구별되는 것입니까?

-나는 문화적 장이 그 자체로서 닫혀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내 모든 저작은, 특히 교육에 관한 저작들은, 엘리티즘의 대척점(對蹠點)에 있어요.

나는 다만 가장 '선진적인' 문화적 작품들은 문학적 장, 예술적 장, 과학적 장 같은 사회적 소우주들의 산물이라는 것을 강조했을 뿐이지요.

그 사회적 소우주들 속에서는 생산자들이, 극단적으로는, 자신들의 경쟁자들만을 고객으로 삼을 수 있지요. 그런 상황은 생산자들 각자에게 무시무시한 '검열' 의 효과를 낳을 수 있고, 그 '검열' 이 끝없는 자기 경신을 낳는 겁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전혀 모순됨이 없이, 이 소우주들의 닫힘이 거기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것의 독점권을 주는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말했지요.

나는 '보편적인 것' 이라는 말로 인류 전체가 나누어야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쟁취물들을 뜻하는 겁니다. 독점은, 그 정의상, 견딜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나는 보편적인 것의 접근 조건들을 보편화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말했죠.

-선생님은 흔히 '세계화'라고 불리는 현상에 반대합니다. 선생님의 반(反)세계화주의는 일종의 반미주의를 포함하는 것입니까?

-세계화의 개념은 서술적인 동시에 규범적이에요. 세계화는 한편으로 서로 다른 기술적 요소들이 선호하는 경제적 장의 통일 과정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통일에 대한 모든 장애물의 철폐를 겨냥하는 정책을 환기시키기도 하지요.

이 통일은, 사람들이 더러 무심코 믿는 것처럼 조화로운 경제적 사회적 단일체 안에 모든 시민들과 민족들을 통합하기는커녕, 실제로는 오늘날 경제계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무제한적 지배의 첫번째 조건입니다.

미국이, 그리고 부차적으로는 유럽 연합과 일본이 경제적 장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들 국가들의 위치는 세계경제의 장이 통일되는 것에 맞추어 더 견고해질 뿐입니다. 특히 국제무역기구 같은 '국제적' 심급(審級)들을 통해서 이들 국가들이 (법률적으로는 정당화한) 정치적 간섭들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 그렇습니다.

모든 종류의 자본을 가장 높은 단계로 집중시킴으로써 바로 자신의 사회적 모델을 보편화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미국의 지배문제를 제기하지 않고서는 세계화를 비판할 수도 없고,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바를 비판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반미주의인지, 세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현실주의적 묘사인지는 당신이 판단하세요.

-사람들은 선생님을 '좌파의 좌파' 의 기수라고 합니다. 그 '좌파의 좌파' 는, 흔히 프랑스에서 교조적 좌파를 지칭하는, 예컨대 전 사회당 총서기 앙리 에마뉘엘리로 대표되는 '케케묵은 사회주의' 와 명확히 구분되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내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된다면, 내게는 모욕적으로 들리는군요. 그리고 대단히 '파리적' 이군요.

당신은 서울 사람들이 에마뉘엘리라는 이름을 알 거라고 생각하세요? 한국일보 독자들 가운데 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내가 30년 전부터 글쓰기와 공적 개입을 통해서 취해온 입장들이 당신이 '케케묵은 사회주의' 라고 부르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걸 알 거라고 당신은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그리고 내가 그 '케케묵은 사회주의' 와 끝없이 싸워왔다는 걸 알 거라고 당신은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나는 당신에게 내 책 '맞불' 을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아니 당신이 그 책을 읽지 않은 채 이런 질문을 했을 테니 앞으로도 읽지 않겠군요. 그러니 한국일보 독자들에게 이 책과 그간에 우리가 써온 모든 텍스트를 읽어보라고 말하겠어요.

그 책들에서 우리는 '케케묵은 사회주의' 에 대한 단 하나의 대안을 정의하려고 애쓴 게 아니라, 당신이 우리를 가두려고 하는 치명적 양자택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는 집단적 창조 작업의 사회적 문화적 조건들을 정의하려고 애썼어요.

당신이 우리를 가두려는 그 치명적 양자택일은 케케묵은 사회주의 아니면 야만적인 신자유주의죠. 야만적 신자유주의는 케케묵은 사회주의와 많은 재산을 공유하고 있죠, 예컨대 과학주의적 테러리즘 같은 거요.

-저는 선생님을 케케묵은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정치적 문화적 입장에 거의 동의합니다.

다만 선생님의 입장을 좀더 또렷이 드러내기 위해서 '악마의 변호사' 역할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의도적인 악역이었던 셈이죠.

제 도발적인 질문들에 사과 드립니다. 한 가지 질문만 더 드리겠습니다. 피에르 부르디외라는 이름은 웹진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터넷은 인류를 사이버 에덴으로 인도할까요, 아니면 일종의 조지 오웰적 사회로 인도할까요?-그 문제는 너무 복잡해서 저널리스틱한 양자택일 안에 갇힐 수는 없어요.

확실한 것은 웹이 문화적 공산주의의 도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문화 자본에 따른 불평등들은 거기서도 적어도 다른 곳 만큼이나 또렷하다는 거죠.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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