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업체의 직장여성 A(34)씨는 출장 때마다 이름있는 옷이나 가방을 사들인다. 이탈리아에서 프라다 가방, 미국 출장때는 면세점에서 페라가모 구두와 구찌 시계를 샀다. 패션잡지나 면세점을 통해 그는 새로 나온 상품과 가격을 꿰뚫고 있다.대학 시절 명품에 빠졌던 B(24)씨는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 지하 세일행사장의 단골이었다. "내게 어울릴 만한 가방이나 구두를 보면 잠을 잘 수 없었다.
부모님께 카드를 빼앗겼다 되돌려받기를 반복하면서도 세일 때면 몇 개씩 사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춘기 열병 같았다." 43세의 회사원 C씨는 "싸구려 여러 벌 사느니 좋은 것 하나를 사겠다"는 지론을 편다.
그는 출장 가는 동료에게 부탁해 아내의 버버리 코트를 샀다. C씨의 가방, 명함집, 벨트 역시 프라다 또는 발리다.
'명품족'이 퍼지고 있다. 꼭 부유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명품이 낯설지 않은 이들. 월급을 쪼개 수십만원짜리를 사는 사람들. 시장에서 옷값은 깎아도 명품은 "비싼 값을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 누가 입은 옷과 가방이 어떤 브랜드인지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일명 '선수들' 이다.
소수 부유층, 50대쯤 되는 나이 지긋한 이들만이 명품의 소비자라고 여겼던 고정관념은 무너진다. 20~30대 월급쟁이, 패션에 민감한 여성, 학생 중에서 프라다, 구찌, 아르마니, 베르사체, 샤넬, 루이비통, 페라가모 하나쯤 가진 이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옷은 몇만원짜리여도 가방, 구두, 지갑, 벨트, 선글래스, 액세서리 등은 명품이다. 명품 의류는 100만원이 넘지만 상대적으로 잡화는 접근이 쉽기 때문이다.
정 눈에 밟히면 12개월 할부나 명품계를 들어서라도 사고 만다. 이도 저도 안되면 시장에서 가짜를 산다. 명품족의 특징이다.
신흥 명품족은 백화점 판도를 바꾼다. 1990년 갤러리아백화점이 명품관을 열었을 때만 해도 그곳은 소수를 위한 성역이었다.
그러나 최근 1~2년새 롯데, 신세계 등에서 '명품 모시기'가 치열하다. 강남과 달리 대중적 백화점인 이 곳에서 수입 브랜드들이 몰려있는 곳을 공공연히 명품관이라 부른다.
현대백화점 본점의 경우 8월 하루 평균 매출(2억3,000만원)이 전년보다 52.8% 늘었다. 루이비통, 프라다, 까르띠에 등 1층 잡화명품 부문만 73% 성장했다. 젊은 명품족이 백화점의 매출성장을 주도하고 있다는 뜻이다.
10만원 미만의 티파니 백금반지나 구찌의 휴대폰줄, CD케이스 등은 10대까지 유혹한다. 현대백화점 명품 바이어 이순순 과장은 "20대 젊은 층의 유입이 명품 매출호조의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그런가 하면 서울 압구정동, 동대문시장 등에는 명품 할인매장이 더러 있다. 아파트 단지에서 알음알음으로 싸게 파는 보따리상도 있다.
심지어 최근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최대규모의 할인매장이 생겼고 명품 거래 인터넷사이트도 성업중이다. 상상하기 어려운 명품의 대중화다.
명품 브랜드 홍보담당자들은 "이미지관리를 위해 지사 외엔 물건을 흘리지 않지만 보따리상이 원산지 세일 때 사들이는 것은 막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정도 열풍이다 보니 원산지에선 크게 비싸지 않거나, 중년을 위한 브랜드들이 '한국 명품'으로 둔갑하는 거품도 있다.
또 우리나라만큼 모조품 시장이 거대한 나라도 드물다. 때로 본매장에서조차 진품과 구분 못하는 우리의 제조기술은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패션업계 한 관계자는 "동대문 등 재래시장의 복제품 인기가 거꾸로 일반인에게 명품을 소개, 홍보하고 젊은 층을 명품 소비자층으로 끌어들인 면이 없지 않다"고 분석했다.
명품족이 우리나라 패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리지 않을까? 그런 것 같진 않다. 좋은 물건 쓰는 걸 비난할 수는 없지만 최근의 명품신드롬은 최고, 일류만을 고집하는 사회풍조를 반영하고 있다.
명품족은 나의 스타일이 아닌, 나의 상품을 추구한다. 나의 선택, 나의 개성에 대한 자신감은 오히려 적다. 명품의 이름을 빌려 자존심을 충족하거나 남과 차별화하자는 것이다.
일류 대학, 1등, 가장 잘 나가는 물건이 아니면 아예 가치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일류주의의 또 다른 면이다. 이런 점에서 명품족은 몰개성이라는 한 얼굴을 가졌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국내 최대 규모의 명품 할인매장이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있다. 1일 문을 연 올에이수입명품관이다. 명품과 버스터미널. 어울리지 않는 조화다.
명품이 흔하게 널린 것에 더욱 놀란다. 80개 매장이 들어섰다. 10월 중순이면 292개 매장이 들어설 예정이다. 프라다, 베르사체, 아르마니, 구찌, 까르띠에, 돌체 앤 가바나, 버버리, 캘빈 클라인, 셀린느, 펜디, 안나 슈이, 제니…. 최고급 브랜드 중 없는 건 루이 비통과 샤넬 정도다.
99만원짜리 까르띠에의 자주색 배낭이 눈에 든다. 상점주인이 "까르띠에 200주년 기념으로 출시된 가방으로 백화점에서 130만원 받는다"고 말했다.
갤러리아에 확인해 보니 가격은 114만원. 어쨌든 15만원 싼 게 확인됐다. 버버리 붉은 트렌치코트는 69만9,000원. 봄 코트라 롯데백화점 매장엔 없었다. 디자인이 같은 가을용 코트만 129만원에 팔리고 있다. 백화점 점원은 "봄 코트는 89만원에 판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비싼 백화점 임대료 안 내지, 직수입하지, 백화점보다 20% 싸다고 보면 돼요." 상인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현금으로 사면 10% 정도 더 깎아주는 곳도 있다. 값이 싼 이유는 원산지의 창고매장 등에서 염가 수입이 가능하기 때문. 그러나 백화점 물건과 색상이나 안감 등이 약간씩 달라 일률적인 가격 비교는 어렵다.
상우회 최한정 광고홍보실장은 "물건은 모두 진짜다. 의심스러우면 원산지 증명이 있는 수입면장을 보여준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품목이 다양하지는 않다. 가방, 지갑, 벨트, 시계 등에 집중돼 있는데 하늘색 베이지색의 프라다가방은 모두 지난 시즌 제품이고, 똑같은 셀린느 핸드백을 진열한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래도 명품이 좋다면야 크게 구애받을 점은 아니다.
김희원기자
■나는 이래서 명품족
● 명품은 오래 쓴다
명품이 과소비이고 거품이라는 지적은 모르는 사람들 얘기다. 1, 2년 쓰고 버리는 물건인가. 대를 물려준다. 다른 사람들이 5만원짜리 1년 쓰고 버릴 때 나는 50만원짜리를 10년 아니라 30년을 쓰겠다. 훨씬 경제적이다. 또 명품 브랜드는 패션을 리드하는 만큼 어차피 유행 디자인이 여기서 나온다. 명품이 주는 품위와 질적 만족감까지 계산하면 가치는 그 이상이다.
● 명품족의 남편
한낱 면바지, 운동화를 십수만원 주고 사는 아내에게 나도 "미쳤다"고 면박을 줬다. 그런데 몇 년을 입은 바지가 물이 빠지기는커녕 빨수록 은은한 제 색깔이 나왔다. 역시 물건은 비싼 걸 사야 한다. 나는 요즘 아내에게 이왕 사려면 좋은 물건을 사라고 한다.
● 아는 사람은 다 알아본다
대학 시절 처음 명품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알아봐 주는 시선 때문이었다. "이거 잡지에 나왔던 거네" "탤런트 누가 했던 거네" 하고 친구들이 알아볼 때마다 희열을 맛보았다. 길거리나 지하철에서도 시선이 꽂히곤 한다. 나도 모르는 사람에게 "영 아닌 애가 명품을 들었네" 하고 쳐다볼 때가 있다. TV에 나오는 연예인의 액세서리나 옷도 어떤 브랜드, 얼마짜리인지 대충 안다. 우리는 익명의 명품 공동체다. 알아보는 시선 때문에 처음엔 로고가 겉에 박힌 제품을 찾았고 가짜도 좋았다. 그러나 이제는 안 사면 안 사지 가짜는 찝찝하다. 명품 아는 사람은 다 알기 때문이다.
●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명품이라고 아무 때나 통하는 건 아니다. 가끔 멀쩡한 진품을 보고 "이거 2만원 줬니?" 하거나 최신 디자인을 보고 "너 왜 이렇게 이상한 옷을 입었니?" 할 땐 정말 짜증이 난다. 명품에 관심 없는 친구들 모임엔 절대 명품을 들지 않는다. 그런 친구들이 어쩌다 "이거 비싼 거니?" 하고 물으면 그냥 가짜라고 대답한다.
● 지출이 부담스럽지만
사실 지출이 부담스럽다. 명품의 함정은 일단 하나를 사면 줄줄이 명품급으로 코디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랑 하나로는 티가 안 나니까. 그래도 여러모로 따져보면 명품이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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