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다르지 않다. 새 천년이라고 그렇게들 주문외우듯 했지만 올해도 여전히 귀성길은 막히고, 온통 그 소식을 전하는 소리들이 요란하다.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 다시 우리는 추석을 맞고 있는 것이다.추석은 어떤 날인가. 풍요로움을 감사해야 하고, 그것을 누리는 잔칫날이라고 말한다. 그 좋은 날, 흩어졌던 혈연이 모두 모여 이 날을 즐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을 찾아 귀향을 서둘고, 그렇게 모여 아예 ‘산 자와 죽은 자’의 공동체를 새삼 확인하고 재현하는 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색하지만 흔한 대로 ‘민족의 명절’이라는 수사(修辭)를 즐겨도 괜찮은 날이다. 어찌됐든 추석은 넉넉하고 따뜻하고 우리다움을 한껏 드러내는 날임에 틀림없다.
한 해를 단위로 되풀이되는 ‘세월의 질서’속에 이러한 날이 하루 끼어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이런 날 아니고는 언제 한번 느긋이 나를 풍요로움과 정다움과 나다움의 긍지 안에 마음놓고 풀어놓을 수 있을 것인가. 참 좋은 날이다.
그러나 또 추석은 어떤 날인가. 아직 가을걷이가 끝나지 않은 채 맞는 성급한 날짜 탓인지 넉넉함은 앞선 마음의 몫일 뿐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올해도 한참 더 여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초가을에 추석을 맞고 있지 않은가.
추석이 다가오면 갑작스레 우리는 내‘가난’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주는 사람은 주는 일을 통해, 받는 사람은 받는 일을 통해, 그리고 주고받는 일이 아예 낯선 사람들은 그렇다고 하는 사실을 통해 넉넉함보다는 모자라고 답답한 가난을 겪는다.
피붙이 사이에서도 그렇고 남과의 사이에서도 그렇다. 그것이 물질일 수도 있고 마음일 수도 있다. 게다가 아무런 마련이 없는 속수무책인 사람들의 허전함과 아픔, 그것은 추석이 낳는 고유한 질병이다. 참 속 상하는 날이다.
하기야 사람살이 제각각인데 명절을 맞으며 이러쿵저러쿵 공연한 말거리를 만들어 지껄이는 일은 못된 짓인지도 모른다.
아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마냥 즐거울 수 만은 없는 날인 것을 어떻게 짐짓 긍정적인 언어와 몸짓만으로 이 날을 보낼 수 있겠는가.
당연히 사뭇 우울하게 지낼 수만도 없는 날이다. 삶이 온통 그렇게 잿빛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음 써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속 상한 현실을 눈감지 않으면서 즐거움을 누리는 일, 즐거움의 현실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속상해 하는 일이 그것이다.
지극히 역설적이지만 삶은 늘 그렇게 펼쳐지는 것이다. 즐거움과 속상함이 어울리는 그 겹친 마당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삶이지 어느 한 쪽에 붙어 다른 쪽을 간과하는 것은 도무지 현실적인 삶이 아닌 것이다.
속상함을 모르는 즐거움은 천박하다. 그리고 즐거움을 모르는 속상함은 자학이다. 이것이 우리네 여느 삶이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일상의 날들 속에서는 느끼거나 생각할 겨를이 거의 없다. 그런데 명절은 근원적인 자기 성찰을 하게 한다.
이러한 성찰의 현실화, 그것을 우리는 ‘명절의 윤리’라고 이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추석이 어떤 날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앞의 답변들에 하나를 더 첨가해도 좋을 듯 하다.
추석은 자신이 훨씬 더 성숙할 수 있는 계기, 우리 삶의 공동체도 마땅히 그래야 하는 계기라고 하는 사실이 그것이다.
여전히 길은 붐빌 것이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즐거움이 기다릴 것이고, 또 번거롭고 피곤한 일들이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일상이 시작되면 꽤 피곤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 때 우리는 나도 모르게 성숙한 나를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래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성숙이 퇴색할 즈음이면 우리는 다시 내년 추석 앞에 서있을 것이다.
/정진홍·서울대 종교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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