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연휴가 끝난 다음날 오전이면 전화 통화량이 부쩍 늘어난다고 한다. 명절 동안의 고생과 짜증을 수다로 풀려는 주부들의 전화이다. 이들에게 수다는 공감과 체념을 통한 갈등해소책이다.추석 연휴를 앞둔 1일 춘천에 사는 주부 15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일명 '수다카페'. 강원 춘천시 약사동의 한 카페에 매월 첫째 금요일 모임을 갖는 이들은 한국여성민우회 춘천 지부 회원과 평범한 주부들이다.
지난 2월 첫 모임을 가진 이후 '주부는 일하는 사람인가, 노는 사람인가?' '부부관계는 무엇인가?' '잃어버린 꿈을 찾아서'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수다를 벌였다. 이번 달의 주제는 '즐거운 명절만들기'.
수동적이고 대책 없는 불평을 늘어놓기 보다 명절증후군을 피할 수 있는 방안을 미리 모색해보자는 것.
모임을 주도한 춘천 지부 남궁순금(39) 회장은 "예전의 수다가 피로회복제 역할을 했다면 이번에는 예방주사가 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주제와 달리 시작부터 참석자들의 고생담이 쏟아졌다. 취업주부인 박모(38)씨는 "똑같이 직장에서 일하는데도 명절만 되면 남편은 본 체 만 체다.
평소에는 가사를 도와주는 편인데도 친척들 앞에서 남자가 부엌 일하는 것을 체통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주부경력 20년째인 한 참석자는 "평소의 고부 갈등이 명절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전번 설에는 손님 30인분의 만두국을 끓였다.
손님들 앞에서 시어머니는 숟가락을 들자마자 '뭘로 간을 했느냐? 만두국은 소금이 아니라 간장으로 간을 해야 한다는 걸 아직도 모르느냐'고 면박을 줬다"고 말했다.
하지만 '못 된 시어머니 흉보던 며느리가 더 무서운 시어머니 된다'는 속담처럼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명절 풍경도 점점 바뀌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남궁씨 가족은 오랜만에 친척이 모이는 명절이면 가족회의를 한다. "부모님 환갑 잔치 준비에서 동서들끼리 꽁했던 일까지 모두 털어놓는 자리가 된다. 음식을 앞두고 얼굴 찡그리는 사람은 없으니 평소 할 수 없었던 얘기까지 다 끄집어낸다."
최모(36)씨는 "명절은 일하라고 있는 게 아니다. 모든 가족이 함께 쉴 수 있도록 차례음식 가지수와 양을 대폭 줄였다. 함께 일을 끝내고 남는 시간에는 노래방을 가거나 등산을 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이모(40)씨는 "전과 나물 등 음식을 각자 집에서 준비해 추석 아침에 한 집에 모인다. 차례도 꼭 장남집에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 집을 돌아가면서 공평하게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장남이 모든 재산을 상속 받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다른 형제자매와 상속분이 같아졌기 때문에 차례에 대한 의무도 동등하게 져야 한다는 것이다.
'수다카페'의 참석자들은 사회와 가족 관계의 변화에 따라 명절을 보내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자 불만이었다. 오후 8시에 시작해 밤12시가 넘도록 이어진 수다의 한계이기도 했다.
김동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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